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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건의 음악영어 칼럼] Composers of Classical Era - 고전시대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작곡가 Haydn, Mozart, Beetho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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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건의 음악영어 칼럼] Composers of Classical Era - 고전시대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작곡가 Haydn, Mozart, Beethoven
  • kim young kon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25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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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예민한 음을 다루는 음악가들은 성격이 까다롭고, 특히 곡을 창작하는 작곡가들은 괴팍하고 자아가 강한 편이므로 사교적이지 못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집착하는 편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선입관(preconception)이 있지만, 필자는 고전시대의 훌륭한 작곡가들은 한마디로 지적이며, 때론 용감하고 의롭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지적(intelligent)이라 함은 자신의 생각을 음악적 논리와 소리로 표출하여 인정받았고, 둘째, 용감(brave)하다 함은 그들이 살았던 부당한 사회 규범과 틀에 맞서서 도전하였으며, 셋째, 의롭다(righteous) 함은 음악예술을 통한 진실한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칼럼은 고전시대의 뜨거운 음악적 열정을 가진 세 명의 작곡가, Haydn, Mozart, Beethoven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adaptation) 했으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들의 예술적인 삶을 간단히 조명하고자 한다.

▲Franz Joseph Haydn(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출처/The Enjoyment of Music)

Franz Joseph Haydn(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1732-1809

수레바퀴 제작자(wheel wright)의 가난한 부모를 둔 Haydn은 Austria 남부의 작은 도시 Rohrau에서 태어났다. 
평생 비상한 음악의 세계를 그려낸 하이든이지만 먼 친척에게서 음악 기초를 수업받았고, 후에는 작곡가인 성악 교사에게 몇 차례 작곡 수업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는 Vienna의 성당에서 성가대원(choirist)으로, 음악교사로 또한 거리의 악사로 활동하며 자신의 민속적 음악 토양을 쌓아 나갔다. ☞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독일명은 Wien이다.

그가 29세에 예술을 사랑하는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공작을 만나 계약 관계를 갖고 그의 후원하에 음악적인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길은 비록 고된 섬김과 봉사로서의 삶이었으나, 다양한 음악의 창작과 많은 활동의 요람(cradle)을 가진 평온한 삶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의 말년에 영국에 초청받아 런던을 방문하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음악가로서의 존경(respect)과 명예(honor), 또한 부((wealth)를 안고 그가 사랑하던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의 애국의 마음이 현악4중주 <Emperor-황제>에 담긴 것처럼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영국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으나, 단 하나 나의 모국 오스트리아가 없다!’ ☞ 이때 영국에서 활동하며 쓰여 진 교향곡들이 'London Symphony'이다.

또한 그의 사사로운 것을 언급하자면 그는 젊어서 결혼했으나 불행하게 지냈고, 결국은 파혼하여 독신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형식미(formal beauty)를 갖춘 많은 음악작품을 남겨주었으며 ‘A Father of Symphony-교향곡의 아버지’ 그리고 ‘고전파음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하겠다. 

▲Wolfgang Amadeus Mozart(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출처/The Enjoyment of Music)

Wolfgang Amadeus Mozart(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1756-1791

모차르트의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를 보면 그의 부친 레오폴드 모차르트(Leopold Mozart)가 어린 모차르트를 엄격하게 교육하는 장면에서 그 부친이 뛰어난 음악가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는 5세부터 그가 지닌 절대적인 음악성으로 작곡을 시작하고 연주여행의 길에 오르며 일생 동안 다양하고 순수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자유분방한 천재는 당대의 사회에 적응하며 예술의 고된 길을 가면서 인간의 기쁨, 슬픔, 고뇌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때론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려 비위를 맞추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작품들도 만들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로서 자존감 있는 삶을 구현하기 위한 고통의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대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려서부터 천재적으로 작품을 쏟아낸 것 같이 생각하지만 다음 자신의 고백을 주목해 보자. 

“People make a mistake who think that my art has come easily to me. (사람들은 내 예술이 나에게서 쉽게 나왔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한다.)
Nobody has devoted so much time and thought composition as I.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에 많은 시간과 생각을 쏟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There is not a famous master whose music I have not studied over and over" (내가 몇 번이고 음악을 반복해서 공부하지 않은 유명한 거장은 없다.)

작은 체구의 병약한 남자! 그는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heritage)들을 남기고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겨울바람과 함께 빈민묘지에 내던져졌고 지금은 기념비만 남아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Karl Barth는 모차르트 음악에 심취해 있었으며 “천국에 가면 신학자들을 만나는 것보다 모차르트를 만나 안부를 전하고 싶다”라고 했다.

▲Ludwig van Beethoven(루트비히 판 베토벤)(출처/The Enjoyment of Music)

Ludwig van Beethoven(루트비히 판 베토벤) : 1770-1827

베토벤이란 이름은 ‘덩굴 밭’이란 뜻이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성악가이며 알코올 중독인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 모진 음악 훈련을 감내해야 했다. 조실부모하고 생계를 위한 음악의 길에 서기 시작하면서 그의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음악으로 우뚝 서기 시작할 20대 후반부터 찾아온 치명적인 질환 앞에 삶이 무너지기 직전, 그는 음악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다시 일어섰다. ☞ 그는 청각 상실과 큰 좌절 속에 자살을 위한 ‘Heiligenstadt note’를 남겼으나 결행하지 않았다.

그 고난을 이기며 활화산과 같은 창조력으로 남긴 작품들이 그 자신과 인류문화의 음악세계를 빛나게 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자신이 귀족이나 집단에 종속하지 아니한 독립된 한 예술가로서의 길에 서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예술가이며 창조자이다. 따라서 왕족, 귀족보다 더 고귀하다.” 또한 자신의 삶을 반영하듯 때론 그의 음악 속에 억압(suppression), 투쟁(strife), 극복(conquest), 승리(victory)로 나타나곤 한다.

인간적인 고뇌를 극복하고 숭고한 열정으로 음악예술을 극치(culmination)에까지 열어 놓은 베토벤을 온 인류가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다. 1827년 이른 봄, 눈발 날리고 때아닌 천둥까지 치는 날 57세로 고난의 생을 마감했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숨겨진 베토벤의 영화 <Beethoven Lives Upstairs>를 추천하고 싶다. 그 안에 특정한 시절의 생활과 격정적이고 불같은 기질, 또한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지닌 그의 모습들이 음악과 함께 나타난다. ☞ 이 영화는 전 가족이 함께 볼 수 있으며,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고 영어 공부에도 좋은 드라마다.

또 한 가지 작곡가들은 오늘날 한 국가의 부(wealth)의 창출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당대 음악가들의 활동 중심지인 Vienna를 품은 오스트리아는 그 나라의 예산을 음악가들이 만들어내는 관광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위에 소개한 고전시대 작곡가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불후의(immortal)의 작품들은 온 인류에게 특별히 순수음악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큰 벗으로 남아 있다. 다가오는 봄에는 영국의 Rosemary Brown처럼 한번 그들을 만나 대화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혹시 필자의 적은 소견으로 그들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지 못했거나 폄하(貶下)하였다면 밝은 미소로 용서를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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