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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박보미 에세이] 와인&클래식 "그들이 사랑한 여인들(2)" 연인을 위한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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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박보미 에세이] 와인&클래식 "그들이 사랑한 여인들(2)" 연인을 위한 와인
  • 박보미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26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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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스토리 그 두 번째 이야기 - 사제(성직자,Priest) 음악가

"에로스(Eros)가 없는 작품을 진짜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가 없는 작품은 나의 작품이라 할 수 없다." -G.Puccini-

지난 글에서 작곡가들의 사랑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예술가로 살았던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복잡하고도, 알 수 없는 이해관계가 많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푸치니의 말처럼 사랑과 이별, 증오가 그들의 작품 창작에 있어 더욱 활력을 주었고,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이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들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갈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사제(성직자,Priest)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로 추정되는 초상화/출처 나무위키
▲안토니오 비발디로 추정되는 초상화/출처 나무위키

-감출 수 없는 본능(本能)으로 사제를 포기한 비발디 A.Vivaldi-

비발디는 167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비발디는 태어나서부터 너무 허약했던 탓에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을 오가고, 그로 인해 어린 시절 내내 병치레가 잦았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살았던 비발디의 아버지는 비발디가 사제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였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라 비발디는 10세부터 성당의 후원을 받으며 성직자가 될 준비를 했고, 15세에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집안 내력으로 붉은 머리 색깔 때문에 비발디는 '붉은 머리 사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정식으로 사제 서품(敍品, ordinatio)을 받았으며 수도원에 머물렀는데, 워낙 몸이 약했던 비발디는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는 다른 성직자들과 달리 수도원의 배려로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좋아하는 음악도 할 수 있고, 배려 속에서 조금은 여유있는 사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세상 속에서 사제의 길을 걷기에 어찌 쉬울 수 있었겠는가, 사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여인과의 염문설(艷聞說)이 돌고, 주체할 수 없는 음악의 재능은 사교 음악회와 여인들이 모인 곳을 떨칠 수 없게 하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사제의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수도원에서는 비발디를 고아들 중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교육시키는 병원의 부속되어있는 피에타 음악원(Seminario musicale dell'ospidale della Pieta)에 교사로 지명하였다. 비발디는 음악원에서 열심히 교육하고, 지휘를 하여 피에타 음악원의 음악 수준은 매우 뛰어났으며, 높으신 분들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많은 금액의 돈도 지급되었다. 항구 도시로써 자유로운 베네치아 풍경과 풍족한 지원을 통해 많은 연주회를 열었으며, 당시 고아원에 방문하는 신분이 높은 분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가브리엘라 벨라가 그린 1720년경 베네치아의 고아원이 연합한 음악회/출처 나무위키
▲가브리엘라 벨라가 그린 1720년경 베네치아의 고아원이 연합한 음악회/출처 나무위키

그 속에서 프레데리크 4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 집 Op. 2를 헌정하였다. 음악원에서 지내면서 비발디는 오페라 작곡에도 몰두하였다. 그 사이 비발디는 제자였던 소프라노 안나지로와 스캔들(scandal)이 떠돌았다. 사제가 여인을 만나는 것도 금지된 일인데,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제자와의 스캔들은 더욱 용납이 될 수 없는 일 이었다.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안나지로가 비발디를 간호 해주면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비발디의 부인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여파는 더이상 사제의 길을 걸을 수도, 피에타 음악원에서 교사로서도 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사제를 그만두고 지내던 페라라(Ferrara)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고정적인 수입도 없어지도, 머무를 곳도 없어져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맞이한 비발디. 이전에 만들었던 작품들을 출간하거나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음악적 성향은 바뀌어가고, 비발디의 음악도 환대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비발디의 말년은 사람들의 관심이 식었기 때문에 빈이라는 타지에서 외롭게 사망하였다.


바로크 시대(Baroque 16세기 말~18세기)의 음악은 바흐(J.S.Bach), 헨델(G.F.Händel)그리로 비발디 세 사람을 대표적으로 이야기 한다.
이 시대에는 세속(世俗)적인 음악보다 종교적인 음악들이 주를 이루고 그 수요가 더 많았다. 하지만 바로크에서 전고전으로 넘어가는 시기엔 비종교적인 음악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비발디의 음악은 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이 많은데, 자기 자신을 표절한다 할 만큼 그의 음악들이 비슷하다고, 저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비발디의 협주곡은 구성이나 창의성에서 이전의 바로크 음악들에 비해 뛰어남을 보이고, 그의 음악에는 셈 ,여림이나 빠르기(tempo), 그리고 솔로(solo)와 협주(Tutti)등 대비 효과를 많이 이용하여 후의 협주곡 형식이 보여지는 것을 보면, 비발디 또한 앞서 시대적 음악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서간 음악가가 분명하다. 이는 본질적 성향을 누르고, 사제 음악가로 살았어야 하는 그의 이중적인, 세상과 사랑에 대한 갈증이 더욱 더 그의 음악적 스타일에 반영된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불안과 아픔을 잊기 위해 사제가 된 리스트 F.Liszt-

리스트는 1811년 헝가리 출생으로 낭만주의(Romantic music 18세기 후반~19세기) 음악가이다. 비발디보다는 130년이나 후에 나타난 음악가로, 역사상 최고의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의 파가니니라 불릴 정도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 명성이 남아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리스트는 백작 가문들과 스승들의 후원 속에서 음악 수업을 받고, 연주가, 작곡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었다. '리스트 붐'이라 할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끄는 연주자였다. 그의 가족들은 리스트의 연주여행을 시작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프랑스로 가 파리 음악원에 입학원서를 넣었는데, 당시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리스트는 개인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연주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고 실력을 쌓아갔다. 그러나 어머니와 떨어져 연주여행을 계속하던 그의 심신은 지쳐가고 무대에 오르는 것 또한 스스로를'서커스의 동물'이라 할 정도로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연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바람을 거절하고 그의 아버지는 휴양을 위해 온천에 갔는데, 여기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16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도하고, 지휘해주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리스트는 흔들리기 시작하고, 당시 약혼자와의 파혼으로 모든 음악 활동에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그 시간 동안 음악 외의 문학과 교양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문학과 예술, 음악의 집결모임인 '살롱(salon)문화'가 유행하던 시기 리스트는 다시 음악의 열정과 그간 쌓아온 지식으로 최고의 인기인이 되기 일쑤였다. 그는 금발에 큰 키를 가졌으며, 마른 몸매에 피아노를 연주할 때 보이는 얼굴의 옆면은 아주 인상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당시 음악평론가로 일하던 슈만은 <음악신보>에 "리스트의 얼굴은 어떤 화가라도 그리스 신의 모델로 삼을 만하다고 말했다."라고 쓸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뛰어난 연주와 외모, 교양과 지식까지 갖춘 남자에게 어느 여인이 반하지 않겠는가? 아무쪼록 그렇게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무렵, 운명과 같은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마리다구 백작부인/출처 나무위키

마리다구 백작부인(Comtess Marie d'Agoult, 1805-1876)이 리스트의 여인이었는데, 백작부인은 리스트보다 연상이었으며, 남편과 아이가 있는 유부녀였기에 모두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 동거를 시작해 3명의 아이까지 얻게 되었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오래 지속되고, 변하지 않을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리스트는 그 당시 가장 인기있는 음악가였고, 가는 곳마다 귀부인들의 마차가 줄을 지어, 리스트를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백작부인은 리스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원하고, 리스트가 외부 활동이 아닌 가정에 충실해주길 바랐다.

당시 씀씀이가 크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전형적인 귀족 출신 백작부인과 달리 리스트는 음악적 활동에 있어 자유를 원하고, 그녀와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연주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여성과의 만남도 자유롭길 원했고, 실제 다른 여성과 서신을 주고받는일도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10여 년 만에 결말을 맺고, 각기 다른 삶을 찾아간다. 그 후 원하던 대로 자유를 누리던 리스트는 동유럽 투어를 떠나는데, 그때 그의 일생 두 번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 또한 유부녀로 비트겐슈타인의 공작부인(Caro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으로 딸이 있는 여인이었다. 남편과는 별거 상태였지만, 이혼을 하지 않은 관계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다. 

1847년 경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출처 나무위키
▲1847년 경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출처 나무위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만난 리스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음악적 전환기를 맞는다. 이전에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 유명했다면 이때부터는 지휘자로 데뷔하면서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생겨 그에 관련된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장엄미사>,<파우스트 교향곡>,<단테 교향곡>,<피아노 협주곡> 같은 곡들이 탄생되었다. 사이가 점점 좋아지고, 음악과 삶 모든 부분에서 안정을 얻게 되면서 두 사람은 결혼을 원했으나, 전 남편과 이혼을 하지 못한 상태로 사실혼 관계만을 유지하며, 결혼까지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전 남편과 재산분할 문제로 몇 번의 법적 소송이 진행되고,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이별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한다.


이렇게 리스트는 두 번째 운명적 여인과의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륜이라는 비윤리적인 생활과 반대로 두 사람의 신앙심은 두터웠다는데,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인지 그간의 삶을 사죄하는 뜻에서 인지 공작부인은 리스트에게 종교에 귀의할 것을 제의하고, 리스트 본인도 세상 모든 것을 누린 후 맞이한 세상에 대한 허무함과 상실감에서인지 쉰이 넘은 나이에 사제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다.

비록 정식 사제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수도자의 길로 들어선 리스트는 이후 다수의 종교음악을 작곡을 했다. 평생 술과 담배를 즐기다 보니 노년엔 몸에 이상신호가 오고, 결국 그는 폐렴으로 70대에 생을 마감했다. 한편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를 잊지 못했던 마지막 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심한 충격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리스트가 사망한 지 8개월 만인 1887년 3월에 사망했다.

리스트는 19세기 피아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음악가로, 교향시(symphonic poem)를 창시한 '교향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리스트는 작곡뿐만이 아니라 기존 다른 작곡가들의 오케스트라나, 피아노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곡들도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나 베토벤 교향곡 9곡 모두, 생상스 죽음의 무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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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연말 모임과 송년회의 분위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와인 화이트 와인(출처/픽사베이)

닥터 루젠 리슬링(Dr. Loosen Riesling)
추운 겨울에 화이트 와인이라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종 연말 모임과 송년회의 분위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와인 또한 화이트 와인이 아닌가 싶다. 리슬링은 독일 대표 와인으로 남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와인이다. 더욱이 독일 와인은 상큼하면서도 스윗함이 시작되는 연인, 혹은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에서 기분 좋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와인이다. 독일의 리슬링이나 아이스와인은 당을 첨가하지 않고, 수확 방법에 의해 당도를 맞추는데, 그래서 한 두 잔 마시면, 갈증 나고 텁텁한 단 맛이 아닌 신선하고, 개운한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


닥터 루젠은 200년 넘게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와이너리로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비료만 사용하여 포도를 생산하는 와이너리이다. 닥터 루젠 리즐링은 레몬 빛깔을 띠며, 아오리 사과, 레몬같이 상큼하면서도 잘 익은 복숭아의 달콤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달콤한 맛 속에서 싱그런 산미가 입안의 청량감을 주어, 깔끔하고 개운한 피니시를 준다.
달콤하면서도 생생한 리슬링 한 모금에서 비발디의 리듬미컬하고, 생동감 있는 바이올린 소타나와 리스트의 피아노 곡에서 섬세하게 연주되는 오른손의 움직임이 입안에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 든다.
잔속에 비치는 리슬링의 밝은 레몬 빛깔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주회의 중심이었던 두 사람의 모습 또한 밝고, 생기있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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