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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이지선 와인 칼럼] 술의 역사를 바꾼 벌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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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이지선 와인 칼럼] 술의 역사를 바꾼 벌레 한 마리
  • 이지선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2.0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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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억의 포상금이 걸린 유일무이한 벌레, 필록세라
- 칠레 와인만이 진짜 와인이다?

 

▲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필록세라 (출처:와인폴리)
▲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필록세라 (출처/와인폴리)

단, 1mm의 벌레 한 마리가 전 세계의 술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면?
역사상 유일무이한 이 벌레를 소개한다. 이름은 ‘필록세라 바스타트릭스 Phylloxera Vastatrix’, 한글명은 ‘포도나무뿌리진디’이다. 이름부터 거창한 이 벌레는 고작 0.8~1.1mm에 이르는 작은 몸을 가진 진딧물의 일종이다. 

포도나무뿌리에서 수액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데, 필록세라가 침범하면 뿌리에는 혹이 생기고 가지는 말라비틀어지며 잎은 누렇게 변하다 마침내 포도나무는 생명을 다하고 만다.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낳는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는 이 벌레는 또한 다산의 왕이다.

 

▲ 프랑스 와인 산지 지도, 필록세라가 처음 보고된 동남부의 론Rhone 지역(출처:와인폴리)
▲ 프랑스 와인 산지 지도, 필록세라가 처음 보고된 동남부의 론Rhone 지역(출처/와인폴리)

1863년 프랑스의 남부 론 Rhone 지역에서 이 벌레의 존재가 처음으로 보고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프랑스 전역이 감염된다. 프랑스 포도밭의 70% 이상이 황폐하게 변했으며 1880년에는 이윽고 프랑스 중남부 지역 대부분의 포도밭이 초토화되었다. 

워낙 작고 뿌리에 기생하는 까닭에 처음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 때 포도재배자들은 날씨와 토양을 탓했다. 그 현상이 너무나 빠르고 원인불명이었기에 종교계에서는 ‘신의 노여움’이라고 결론짓기도 했다. 때마침 프랑스의 출산율이 바닥을 칠 때라 불임률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1869년 범국가적으로 조사에 착수한 후에야 이 작은 벌레가 이 현상의 범인임을 알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필록세라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프랑스의 토양 밑에서 혼자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검역’이라는 시스템이 없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포도나무의 실험적 목적을 위해 남부 론에 수입되었던 미국산 포도나무뿌리에 바로 이 벌레가 조용히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필록세라는 미국의 포도나무와는 사이가 좋았다. 그 뿌리에 공생하며 살고 있었고 그러다 프랑스에 들어오며 유럽의 포도나무에게는 대재앙이 되었다. 미국의 토착 포도나무와 유럽의 그것은 종부터 달랐으니 미국종은 ‘비티스 라부르스카 Vitis Labrusca’, 유럽종은 ‘비티스 비니페라 Vitis Vinifera’로 나뉜다. 

 

▲ 좌: 와인 양조용 포도 '비티스 비니페라', 우: 식용 포도 '비티스 라부르스카' (출처:와인폴리)
▲ 좌: 와인 양조용 포도 '비티스 비니페라', 우: 식용 포도 '비티스 라부르스카' (출처/와인폴리)

이름은 어렵게 느껴지지만 정리하면 미국종은 우리가 흔히 먹는 식용 포도이며 유럽종은 와인을 만드는데 쓰이는 와인 제조용 포도이다. 이 미국종 포도나무들은 필록세라에 면역력이 있었으나 유럽종에게는 치명적이었기에 손쓸 겨를도 없이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포도밭에 독성이 강한 농약을 살포하고 물을 범람시켜 밭을 침수시키기도 하였지만 해결책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모두 실패하게 된다. 1년만 망쳐도 먹고 살 일이 막막한 것이 농사인데 포도밭을 송두리째 잃은 와인 생산자들은 살 길을 찾아 프랑스를 떠나게 된다. 

프랑스에 이 벌레가 창궐할 때 와인메이커들은 스페인과 다른 유럽으로 건너가 와인을 만들며 양조 기술과 다양한 노하우를 전파하며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다 점차 확대되는 필록세라의 세력을 피해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의 와인메이커들은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미국, 남아공 등의 와인 산지로 이동하며 신세계의 와인산업을 발전시키게 된다. 

유럽의 와인 생산량이 바닥을 치자 당시까지만 하층민들의 술로 천대받던 맥주가 상류층에서도 빛을 보게 되고 와인을 증류시켜 만드는 꼬냑, 아르마냑 등의 브랜디를 대신해 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내수용 뿐만 아니라 수출용 와인들까지 술에 물을 타거나 포도가 아닌 재료를 이용해 만든 가짜 와인이 판을 쳤다. 샴페인을 만드는 샹파뉴 지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정부에서는 원산지명칭표시제도(AOC)를 정립하게 된다. 

▲ 필록세라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만화 "The phylloxera, a true gourmet, finds out the best vineyards and attaches itself to the best wines."- Cartoon from Punch, 6 Sep. 1890 (출처:위키피디아)
▲ 필록세라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만화 "The phylloxera, a true gourmet, finds out the best vineyards and attaches itself to the best wines."- Cartoon from Punch, 6 Sep. 1890 (출처/위키피디아)

결국, 이 작은 벌레의 목에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다. 프랑스 정부는 필록세라의 퇴치법에 오늘날 약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제시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이제 더 이상 와인을 마실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당시 상황은 참담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저항력이 있는 미국 포도나무뿌리에 유럽 포도나무의 몸뚱이를 접목하는 것으로 이 사태는 일단락된다. 우습게도 재앙을 일으킨 미국 포도나무가 해결책이 된 것이다. 이 해결책이 발표되고 나서도 미국 포도나무 묘목을 구매하지 못하는 영세한 와인메이커들은 구제되지 못했고 많은 와인메이커들이 사건의 발단인 미국 포도나무를 구매해야 하는 것에 큰 반발심을 가졌다.

와인을 처음 공부할 때 미국 포도나무뿌리에 유럽 포도나무 가지를 붙이는 ‘접붙이기’라는 방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포도나무의 생명력이 신기했고 나 또한 와인의 맛이 변하진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그러나, 몸뚱이가 유럽 포도나무 본연의 것이었기에 맛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 걱정은 일단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 미국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포도나무 뿌리를 접붙이기한 묘목(출처:위키피디아)
▲ 미국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포도나무 뿌리를 접붙이기한 묘목(출처/위키피디아)

 

▲ 필록세라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접붙이기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출처:위핀터레스트)
▲ 필록세라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접붙이기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출처/핀터레스트)

 

프랑스에서도 고유의 포도품종이 여럿 멸종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지널 유럽 포도나무는 현재 칠레와 서호주 등에서 재배되고 있다. 필록세라가 창궐하기 전인 1851년 칠레는 프랑스 포도나무를 수입하여 재배하고 있었고 북쪽의 아타카마 사막, 서쪽은 태평양, 동쪽이 안데스산맥 등의 고립된 지리적 위치가 이 벌레를 막아 낸 가장 큰 방패가 되었다. 또한 토양의 높은 구리 함유량, 큰 일교차 등이 벌레가 침범하지 못한 이유로 꼽힌다. 건조한 기후와 모래 성분은 필록세라에게는 불편한 지역이다.

 

▲ 2004년 개봉작, 박신양 주연의 '범죄의 재구성' (출처:네이트닷컴)
▲ 2004년 개봉작, 박신양 주연의 '범죄의 재구성' (출처/네이트닷컴)

2004년 개봉했던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에서 사기꾼인 박신양은 칠레 와인을 극찬한다.

“칠레 와인은 없네?” 
“아니 뭐 프랑스 거 못 마시는 건 아닌데…거 2차대전 때 독일 놈들이 프랑스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잖아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 그런데 포도밭은 남아났겠느냐고? 오리지널 그냥 다 타서 없어졌지! 그러고 나서 다시 심었는데 뭐 포도 자라는 데 하루 이틀 걸리나? 근데 칠레에는 오리지널이 남아 있다 이거죠. 잘 모르는 사람들이 프랑스 와인, 프랑스 와인 찾더라고?” 

그는 아마도 포도밭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전쟁 때문이 아닌 필록세라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거나 극 중 사기꾼의 역할에 충실했나 보다. 지금도 어떤 와인 애호가들은 진짜 와인, 특히 진짜 까베르네 소비뇽은 칠레에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오늘날까지도 필록세라에 대항할 완벽한 무기는 만들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2019년 호주 남부 빅토리아주에도 뒤늦게 필록세라가 침범하며 대재앙을 예고하였다. 약 130여 년 전 고안된 아직은 취약한 이 해결책 대신 하루빨리 이 작은 벌레를 이겨낼 방법이 생기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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