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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이지선 와인 칼럼] 알카포네를 탄생시킨 금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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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타임즈 이지선 와인 칼럼] 알카포네를 탄생시킨 금주법
  • 이지선 와인칼럼니스트
  • 승인 2020.02.2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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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와인의 뿌리를 말살시킬 뻔했던 금주법
- 전 세계를 휩쓴 ‘스픽이지바 Speakeasy bar’의 탄생 비화

만약, 당신이 20살부터 33살까지 약 13여 년간 술을 마실 수 없었다면? 
여기,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냉철한 법이 있었다. 

▲ 금주법이 비준됨을 알리는 1919년 1월에 발행된 신문기사 (출처: 핀터레스트)
▲ 금주법이 비준됨을 알리는 1919년 1월에 발행된 신문기사 (출처: 핀터레스트)

1917년 미 하원의원 앤드류 제이 볼스테드는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음료의 양조부터 판매, 유통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내놓았다. 미국 사회를 부정과 부패, 조직범죄의 소굴로 몰고 간 이 악법은 그의 이름을 따 ‘볼스테드법’으로 불렸으며 1920년 발효된다. 

 

▲ 금주법을 최초로 입안했던 앤드류 볼스테드 Andrew Volstead (출처: 위키피디아)
▲ 금주법을 최초로 입안했던 앤드류 볼스테드 Andrew Volstead (출처: 위키피디아)


지금 들으면 황당한 이 법은 보수주의자들의 맹렬한 지지와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빠르게 통과된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 특히 곡물을 절약하기 위함이 1차적인 목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음주로 인한 생산성 저하가 불만이던 자본가들의 지지, 반이민주의자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의 음주를 크게 싫어한 것 또한 한몫하였다. 물론, 전범국가인 독일의 맥주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한 책략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시에도 시대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참 다르다. 로마제국에서는 원정을 떠나 주둔하는 곳마다 포도나무를 심고 불안전한 식수 대신 와인에 소량의 물을 첨가하여 마시게 하였고 와인을 먹여 사기를 증진시키는 전략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같은 경우에는 와인이 떨어져 패전하고 말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 금주법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술을 처분하고 있는 모습 (출처: Spartacus Educational)
▲ 금주법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술을 처분하고 있는 모습 (출처: Spartacus Educational)

사실, 금주법은 미국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부족한 식량 보존과 절약 등을 이유로 과거 몇 차례 시행되었는데 특히나 포도 같은 과일로 만드는 과실주가 아닌 대부분 쌀과 같은 곡물로 빚는 곡주를 만들던 한국에서는 그만큼 더 절실했을 것이다. 조선 영조 때도 가뭄으로 기근이 들자 강력한 금주법을 내렸었고 더 가깝게는 박정희 정권 시절 주세법을 개정하여 ‘쌀 막걸리 금지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 미국 내에서 금주법이 실시되고 가난한 시민들은 밀조한 진을 마셨고 일반 가정에서는 화장실을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불법 술 양조장으로 이용하게 된다. 술을 제조하는 다양한 장비들의 판매량이 폭등하였고 약사는 의약용 알코올 조제를, 일부 의사들은 알코올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처방전을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고 한다. 

▲ 무허가 술집의 형태를 본 뜬 스픽이지바 Speakeasy bar의 입구 (출처: IDK Tonight)
▲ 무허가 술집의 형태를 본 뜬 스픽이지바 Speakeasy bar의 입구 (출처: IDK Tonight)

부자들은 암호를 대면 입장이 가능한 무허가 프라이빗 클럽을 버젓이 이용했는데 바로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스픽이지바’의 시작이었다. 마치 개인 클럽과 같은 이 무허가 술집은 특유의 아늑함과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을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간판이 없거나 작은 그림만 그려놓은 바 Bar가 몇 년 전부터 성행해왔고 이 문화는 스피릿의 시장을 한층 더 넓히는 역할을 하였다. 

 

▲ 금주법을 반대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출처: TPT Originals)
▲ 금주법을 반대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출처: TPT Originals)

합법적으로 술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막힌 시민들은 향수, 페인트, 소독용 알코올, 부동액 등에서 알코올을 추출하여 마셨고 1928년 뉴욕에서는 이들 중 34명이 4일 동안 잇따라 숨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금주법 시행 이후 알코올로 인한 사망자 수가 크게 줄었다고 발표했지만 금주법이 폐지되기 전인 13년 동안 약 3만 5천 명 이상의 시민들이 이런 독성이 강한 술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 알 카포네 Al Capone, 금주법으로 인해 성장한 마피아로 밀주, 밀매 등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 알 카포네 Al Capone, 금주법으로 인해 성장한 마피아로 밀주, 밀매 등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금주법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알 카포네’를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양지에서의 술 제조와 유통이 금지되니 전국적 규모의 지하 밀주 조직이 생성, 활개를 쳤는데 알 카포네는 이를 이용하여 밀주, 밀매 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 금주법이 폐지되고 기뻐하며 술집에서 건배를 하는 시민들 (출처: boisestatepublicradio)
▲ 금주법이 폐지되고 기뻐하며 술집에서 건배를 외치는 시민들 (출처: boisestatepublicradio)

많은 사회적 부작용과 마피아와 같은 갱단의 급성장을 가져온 이 금주법은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그래서일까, 아직까지 미국 와인의 원산지 및 여러 규제를 담당하는 기관은 ATF(The 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연방주류담배총포관리국)라는 이름부터 살벌한 곳이다.

 

▲ 오크통 속의 와인이 금주법으로 인해 버려지는 모습 (출처: Winefolly)
▲ 오크통 속의 와인이 금주법으로 인해 버려지는 모습 (출처: Winefolly)

금주법은 여러 음지의 문화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교용 미사주 양조 외에는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와인 양조 기술의 퇴보로 인해 다음 세대로 전승될 축적된 지식, 기술, 전통 등이 말살되고 말았다. 

금주법이 실행되기 불과 몇십 년 전, 1800년대 중후반 골드러쉬로 인해 캘리포니아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2년 만에 10만 명이 모이며 인구수가 급증하였고 가장 단기간에 걸쳐 한 주州로 승격되었다. 금광이 고갈되고 남은 이들은 포도 농사를 위한 밭 개간, 와이너리 설립 등에 투입되며 와인 양조 역시 빠르게 발전해가는 듯했다. 

그러나 금주법 이후 말살된 전통과 기술은 회복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고 가장 큰 와이너리 중 하나인 로버트 몬다비와 겔로사의 겔로형제 역시 책으로 와인 양조를 배운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 법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은 있기 마련이다. 시대적 상황 또한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강경책보다 많은 이들이 수긍할 수 있고 조금 더 현실적인 대책을 세웠더라면 시민들이 피해를 보진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술을 빚는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이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 사회 역시 음지의 문화가 발달하는 속도도 더디지 않았을까. 금주법이 시행됐던 그 시간만큼, ’20살이 된 내가 33살까지 술을 강제적으로 접할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면 지나간 20대가 지금처럼 재미있게 기억에 남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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