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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터뷰]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최선 명무와 대를 이어 전통을 지켜나가는 최지원 전수교육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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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터뷰]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최선 명무와 대를 이어 전통을 지켜나가는 최지원 전수교육조교 
  • 백석원 기자
  • 승인 2020.02.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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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알아가고 앞으로 우리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려주어야 할지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채록하고 재발견하고 재조명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림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의 뿌리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가는 계기로 삼기 위해 기사를 기획하였다. [편집자주]

호남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 최지원 씨는 "2018년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일본 한국을 오가며 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 직접 춤을 이수 받았습니다.", "현재는 이수 과정을 수행하려면 전수조교와 수업을 이행해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또한 아버지는 현재까지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습하십니다. 저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라고 아버지의 춤을 전수받아 우리의 전통춤을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춤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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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보존회 공연차 일본에서 우리나라 전통춤을 배우기 위해 온 일본교민 이수자와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최선 명무

최선 명무는 1943년 일제강점기에 여덟 살 소년은 전주 전동성당 뒤 최승희의 제자 김미화가 연 무용연구소로 춤을 배우러 갔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최선 명무의 춤 인생이 시작됐다. 열 살이 되던 해 6.25가 발발하고 김미화 스승이 피난을 가게 되면서 춤을 출 수 없게 된 위기 속에서도 연습에 매진했다.

그때 당시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는 춤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전주국악원에서 본격적으로 전라검무와 동초수건춤, 법고, 승무 등을 배웠다. 당시 배운 ‘동초수건춤'이 바로 그가 추는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된다.

스무 살이 넘어서면서 정인방 선생에게 무당춤과 학춤, 신로심불노, 대감놀이 등을 배우고 공연도 했다.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집세 걱정에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전주 최선무용연구소의 ’가잿골의 전설‘이 최우수상이 없는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80년대에는 해외문화사절단으로 대만, 일본, 홍콩, 미국 등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최선 명무는 평생의 노력으로 마침내 1996년 호남살풀이춤 무형문화재로 등록됐다. 

2009년 8월 29일 최선 명무는 '천년의 한지 숨결로 추다'라는 공연을 올렸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 치료를 병행하면서도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한지의 제조과정을 비롯해 한지 장인들의 일상생활을 표현해 애환과 정신을 담은 춤으로 故 송우석 한지 문화재를 모델로  공연의 대본까지도 직접 써 공연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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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버지 최선 명무와 (우) 최지원 호남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 지정기념 공연 후 사진 (2017.12.29) 

춤으로 일평생을 보내며 “춤은 나의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최선 명무에게는 그의 춤의 계보를 잇는 사랑하는 딸 최지원 씨가 있다.
그녀는 현재 최지원 무용단을 이끌며 경희대 무용학부 강사로 재직 중이다.

다음은 최선 명무의 호남살풀이춤을 계승하여 전통문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최지원 전수교육조교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최선 명무의 막내딸 최지원 호남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 인터뷰

Q1.“아버지께서 춤을 추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을 텐데 춤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오히려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셨고 어머님이 많은 반대를 하셨습니다. 
제가 유치원 다닐 때가 여섯 살이었는데  그 당시 저는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아서 어머님이 공연 날 아침 유치원에 바래다주시며 “엄마가 점심때 데리러 올 거니까 그때까진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며 수업을 듣고 있어야 된다.” 하시곤 가셨는데 전 어머님 오실 때 까지를 못 기다리고 혼자 집까지 걸어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엄청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할 때까지 틈만 나면 어머님은 넌 무용 말고 다른 걸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무용을 그만하자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이 힘든 일을 왜 해서 고생을 하냐며 안타까워 하시곤 했습니다.      

Q2.“네 살 때 첫 무대에 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춤의 어떤 점에 끌려서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땐 예쁘게 화장하고 무대에 서는 자체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주변에 계신 모든 분들이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주시니 아마도 그게 좋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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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준비하는  호남살풀이춤 최지원 전수교육조교 (사진=김두호 작가)

Q3.“전통문화를 계승해 나가는 일이 쉬운 일 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춤을 배우시거나 하시면서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이 있습니까?

-저는 7살 때부터 동갑내기 친구와 같이 무용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창작무용 저는 전통무용으로 분야를 나누다 보니 8살 때부터 살풀이춤을 해 왔었습니다. 어릴 땐 그냥 시키는 데로 동작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해 왔었지만 감정 부분이 늘 고민이 되었습니다. 막내딸로 태어나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서 어려움도 모르고, 한(恨)스러움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였고 경험해 보지 못한 그 감정들을 몸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조금 성장하고부터는 춤이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늘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은 춤 한 자락을 맛을 내며 추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내 몸에 익힐 것들이 너무 많고 몸이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과정들이 행복하면서도 고달픕니다. 

Q4.“요즘에도 전통 한국무용을 계승해 나가려는 분들이 많이 계신지 궁금합니다.”

-네, 많습니다. 오히려 2~30여 년쯤 전에는 창작공연이 활성화되어 전통무용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의 무용계에서는 전통무용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졌고 그래서 누구나 전통춤 한 가지 정도는 자기 춤으로 만들기 위해 계승 과정을 거치고 있고, 더불어 전통춤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자 학술적 연구 또한 다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5.앞으로 한국의 전통무용이 가야 할 방향이나 행해져야 하는 공연이 있다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감히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40년을 춤만 추어오며 느낀 바로는 전통은 늘 묵묵히 제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것이고,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동행할 수 있도록 원형을 지키면서 재구성과 재창작의 과정이 병행되는 작업이 지속적이면서도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최지원 호남 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와의 인터뷰를 통해 근래에 들어 전통무용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졌으며 전통춤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전통문화는 예술가들이 늘 묵묵히 흔들림 없이 보존하고 전승해야 하며 시대의 흐름에 동행할 수 있도록 원형을 지켜나가면서도 재구성과 재창작의 과정이 병행돼야 하므로 전통문화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창작에 대한 지원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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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인정고시된 호남 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 최지원 한국 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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