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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애도(哀悼)의 끝엔 성장(成長)이 올지니, 영화 '모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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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애도(哀悼)의 끝엔 성장(成長)이 올지니, 영화 '모리의 정원'
  • 이산 기자
  • 승인 2020.03.20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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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정원 밖으로 나가지 않은 화가 모리카즈
자식의 요절 이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살아왔지만
정원의 존립 위기 앞에서 비로소 애도(哀悼)를 마치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0년 동안 자신의 집 안 정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지내온 남자가 있다. 머리와 수염은 자르지 않아 길게 늘어졌고, 긴 세월로 인해 얼굴은 노쇠했으며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그를 보고 사람들은 “모리”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신선”이라고 하거나 “요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일본 예술계의 거장”이라고 칭송한다. 그렇다. 그는 낮에는 글씨를 쓰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 화가다.

▲모리의 정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사진/출처=(주)진진픽쳐스)
▲모리의 정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출처=(주)진진픽쳐스)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모리는 자신의 정원에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 그의 아내인 히데코가 대신하여 손님을 맞이한다. 그는 자신에게 글과 그림을 부탁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 반면에, 정원은 모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대상이다. 영화의 초반, 모리는 마치 긴 여정을 떠날 듯이 진중하게 나갈 채비를 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모리가 가려던 곳이 집 바로 앞에 자리잡은 정원일 뿐이고 그마저도 금세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크기인 것을 깨닫고는 곧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된다.

관객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정원이, 모리에게는 너무나도 큰 세상처럼 비친다. 정원 속 콩알만한 개미와 사마귀가 거대하게만 보인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학교는 매우 커다란 곳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그것이 너무나도 작게 보이는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리는 남들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육즙을 튀겨가며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밤중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일을 “학교에 간다”라고 표현한다. 모리는 외모만 노인일 뿐, 어린아이와도 같은 행동을 일삼는다. 혹은, 어린아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처럼 개미를 들여다보는 모리(사진/출처=(주)진진픽쳐스)
​▲어린 아이처럼 개미를 들여다보는 모리(출처=(주)진진픽쳐스)

사실, 모리 부부는 일찍이 자식들을 잃은 경험이 있다. 구체적으로 몇 년 전 인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그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정원 안의 연못을 만들기 시작한 때가 30년 전인 것을 유추해보았을 때, 아마도 그 시점은 어린 자식들을 잃었을 때와 맞물릴 것이다. 모리의 자식들은 시간이 지나도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였지만, 모리는 점점 늙어갔다. 그가 그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을 맞닥뜨리기 두려워서지 않았을까. 대신에,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변화는 오로지 자연의 성장뿐이었다. 정원은, 그가 자신의 아이들 대신 영원할 수 있는 별천지인데다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러한 정원이 변화하는 인간 세상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전처럼 영생을 보장하는 신비한 공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시작과 끝이 있는 인간 세계의 그 무언가로 남을 것인가. 아마 정원의 요정으로 추측되는 (공교롭게도 이 요정은 정원 옆에 아파트를 세우려는 세입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낯선 이가 모리에게로 다가와 이러한 선택을 돕는다. “같이 우주로 가겠느냐”라는 요정의 물음에 모리는 따라갈 채비까지 마무리한 채 놀라운 대답을 한다. “아니요. 나는 남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마디. “이 정원은 아직까지도 내게 너무나도 크거든요.” 정원의 요정은 미소를 짓고 모리의 손을 잡으며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모리에게 같이 떠나자고 권유하는 요정(사진/출처=(주)진진픽쳐스)
▲모리에게 같이 떠나자고 권유하는 정원의 요정(출처=(주)진진픽쳐스)

사랑하는 누군가를 일찍이 하늘로 보냈을 때,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마치 칼날과도 같이 가슴을 후벼 파곤 한다. 그 아이는 여전히 21살이지만, 나는 어느새 90세 노인이 되어 있다. 혹은 그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머물러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힘든 과정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누구는 하루 정도 펑펑 울면 다음날부터 괜찮아질 수도 있고, 누구는 30년이 걸려도 모자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이 애도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이 될 수 없고 오로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 누군가가 “이제 그만해”라고 말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바로 애도의 과정이다.

모리는 아마 30년이란 세월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는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변화를 위한 공간을 자신의 마음속 한편에 조금씩 마련해주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이 그림을 그리는 어린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의 작품을 보고 나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였다. 고로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음을 마침내 마음 가득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고, 애도를 마치며 더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는 정원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것의 원천은 이제 자신의 정원도, 어린아이 같은 자신의 모습도 아니다. 다만, ‘모리가츠’라는 사람으로서 온전히,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잃어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먼저 떠난 이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않고서라도 다시 일어나 살아갈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그 끝에는 성장(成長)한 우리 자신이 서 있다. 그 성장을 먼저 떠나간 이들이 언제나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금은 달라졌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을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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