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컬처타임즈

유틸메뉴

UPDATED. 2021-10-19 12:02 (화)

본문영역

[지해수의 연애 칼럼] 사랑과 동정심에 대한 또 다른 고찰
상태바
[지해수의 연애 칼럼] 사랑과 동정심에 대한 또 다른 고찰
  • 지해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15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니체와 쇼판하우어는 동정심이란 매우 악한것이라 말했었으며, 3년 전 나는 칼럼을 통해 여기에 동의 한다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가를 걷다가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그보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겠는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에 강가에 버려졌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신이 느끼게 될 감정이란...

이것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남자 등장인물인 토마시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인 테레사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다. 그는 그녀를 두고,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맡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그녀에게 느꼈던 첫 감정은 사랑보다 동정심에 가까웠다. 이후에 그의 감정은 사랑일까? 그럴 지도. 그렇다고 모든 동정심이, 토마시의 것처럼 사랑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동정심은 가지는 이에게 매우 '유감'인 감정이다. 대부분 동정심을 갖는 이들은 그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 미안한 감정을 갖게 될지 모른다. 동정심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 면에서 나은 사람이 갖게 된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 그저 조금 더 나아 보이는 사람이 갖게 되는 거다. 사실 누가 더 나은 삶인지- 그건 신 외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동정심은 수동적으로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감정인 건 아닐까?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 그는 '동정심'을 갖게 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저자인 밀란 쿤데라는 동정심에 대하여,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책에,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라고 썼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동정심은, 사랑보다 큰 것 같이 느껴진다. 동정심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수단적-목적적인 관계로 본다. 물론 사랑이 가장 우월한 목적적인 목적이며 동정심은 이것의 수단이 되는 수단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게 된다.

밀란 쿤데라가 동정심을 이렇게 '큰' 부피의 감정으로 느끼게 된  건 왜일까. 그건 거기에 내포된 감정들 때문이다. 동정심은 대부분, 상황이나 환경적으로 나아 보이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에게 갖는 감정이다. 사회적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타자와 본인을 비교하며 자신이 더 낫다고 느끼고 우월한 감정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동정심'이라 느끼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동정심을 엄청 큰 감정으로 느낀 이유도 이러하지 않을까.

위에서 나는 동정심을 갖게 되는 대상이 어쩌면 정해져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설 속 토마시가 과연, 그렇게 불쌍한 여자를 테레사만 보았을까? 아니다. 소설 속 시대적 배경만 보더라도- 아니, 지금 우리가 주변만 보더라도 '참, 힘들겠다'라는 환경이나 과거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런데 토마시는 테레사에게 유독 이러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던 건 아닐까. 

밀란 쿤데라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원작으로 한 영화[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 및 그 시기를 뜻한다.
▲밀란 쿤데라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 및 그 시기를 뜻한다. (출처/영화 '프라하의 봄' 캡처)

나는 3년 전쯤 이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 구간을 인용하면서 동정심에 대하여 쓴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동정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강조했었다. 즉, 동정심과 사랑을 헷갈리지 말자는 식이었다. 사랑은 성숙하고 우월한 것이므로, '동정심'같은 악한 것 따위와 겨누지 말자는 것이 당시 나의 의견이었다. 당시 나는 동정심을 왜, '악'하다고 하였을까? 그건 니체를 인용한 거였다. 니체는 동정심이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동정심이 인류의 발전을 저해해 왔을 뿐만 아니라 도태의 원인이 된다고까지 표현했다. 쇼펜하우어 역시 동정심 때문에 인간의 이 부정된다고 말했다. 

동정심은 한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가 없는 주체로 여기기에 나쁘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매우 성숙하고 성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사랑은 성숙한 어른들- 즉 자기의 자유의지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지혜로운 이들만의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동정심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동정심과 사랑은 다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동정심은 타인의 자유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 틈을 살피는 행위 가운데에 있다. 사랑하는 그 이의 삶에, 내가 좋은 방향으로 개입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에 누가 봐도 '안쓰러운 처지'인 사람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러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단지 이것은 경제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정신적 형편이 안 좋을 수도 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많고 모자람이 없어 보일지라도, 어딘가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아마 그의 빈틈을 채워주고자 하는 이라면, 그의 이러한 빈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감기보다 상대방의 작은 타박상을 더 아파할 가능성이 높다.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아픔이, 나에게도 아픔으로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역시 그러하다. 본인도 어딘가에 집중하다 보면 식사를 잘 잊으면서도 나는 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서로에게 동정심을 가진다. 

사랑은 완전히 성숙한 이들만의 것도 아니고 동정심은 악한 것만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또 어떠한 방식으로 성장시켰으며, 동정심에 대해 이전에 갖지 못했던 감상을 느낄 수도 있게 되었다. 당시 나의 글의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과 동정심에 대한 내 감상은 이렇다는 거다.

동정심을 갖게 하는 누군가가 있는가? 목적적 목적인 사랑까지 갈 목적이 없는 그저, 수단적 목적에 불과한 동정심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이미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사람이기에 동정심이 드는 건 아닐까? 

그 판단은 토마시처럼, 오로지 당신 본인의 몫일 것이다.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 독자분들의 후원으로 더욱 좋은 기사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하단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