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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 클래식 에세이] '오페라 역사' 그냥 읽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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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 클래식 에세이] '오페라 역사' 그냥 읽어나 보자.
  • 박보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29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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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오페라부터 '오페라 역사' 를 모두 이해 할 필요는 없지만 흐름만 알아보자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

1637년 베니스의 산 카시아노 교구에서 최초로 대중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연 이 날을 오페라의 탄생일로 보는 관점도 있으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연극에 그들의 종교적 체험을 부여했듯이, 이미 10세기 초반부터 예의<예배극 liturgicalplay>이 등장하였으며 아직도 이들 중 상당수가 현존해 있다.

예배극의 한 필사본에 여러 군데에 의상과 연지, 무대배경 등에 시문이 있고 오페라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예배극 중에서도 부활절 축일. 성묘. 크리스마스 이야기 등의 주제로 된 것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고, 이 중의 하나인 <다니엘의 극 The Play of Daniel>은 최근에 출판되고 상연되었다.

예배극은 좀 더 정교한 <기적극Mystery Play>으로 발전되어 13,4세기와 그 이후에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또 유럽 전역으로 보급되고 종교극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기적극은 곧바로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로 이어졌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후에 종교극이 교회의 경계선을 벗어난 뒤로는 세속적이고 오락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었는데 이러한 경향 역시 16세기 후반 오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오페라와 직접적인 연결 고리를 형성했던 것은 극 막간에 행해졌던 막간극 (intermedio)었다.  1598년 플로렌스에서 상연된 극들 중 최초로 기록에 오른 <다프네>가있다. 음악은 페리가 작곡했는데 두 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또한 다프네를 다룬 가극 가사는 몇 년 후 독일의 쉿츠에 의한 최초의 오페라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 신 음악을 고급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고양시킨 사람은 바로 모든 시대를 통틀어 위대한 음악천재 중 한 사람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였다.

이탈리아 베니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탈리아 베니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 17세기 로마와 베니스 오페라

몬테베르디는 음악적 재능과 강한 개성으로 카메라타의 이론들에다 예술적이고도 극적인 생명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몬테베르디는 새로운 독창 스타일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옛 기법들과 마드리갈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그는 베르디와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악기의 음색이 갖는 잠재력을 알아보았으며 여러 악기를 사용하여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음색을 이끌어냈다.

사교계의 가장 큰 행사로 프란체스코 곤차가와 사보이 가문의 마르게리타의 혼인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1589년 페르디난도 네메디치의 결혼식 때와 맞먹는 화려한 연극 축제가 펼쳐져 혼인 전 카니발 기간 동안 몬체베르디의 <아리안나Arianna>라는 오페라가 선보였고, 여기서 보여준 애절한 만가는 후일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에서 보여준 디도의 만가를 비롯, 수많은 오페라 만가의 원형이 되었다.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해안을 넘어 로마 남부와 나폴리에까지 번졌으며, 형식은 주로 고전 신화나,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을 빈 연극풍 혹은 전원풍의 형식을 띠었다. 그러나 로마는 벌써 극 형식에 있어서 흥미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흔히 최초의 <오라토리오>로 말해지는 <정신과 육체의 드라마 La 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는 무대배경과 의상이 제대로 갖춰졌기 때문에 교회와 극장을 잇는 매개체가 되었다. 극의 형식은 초기의 예배극 들과 마찬가지로 대사 형식을 띤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상연된 첫 오페라 역시 만투아나 플로렌스 오페라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테파노 란디(Stefano Landi)가 작곡을 한 <산 알레시오 San Alessio>는 고전 신화에 의존하지 않고 15세기 성인 알렉시스의 전설을 다루었다.

초기 오페라에서 희극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후일 비가극 Opera Seria의 등장으로 장차 사라질 운명에 있었지만 베니스 오페라에 있어서만큼은 환영을 받았다. 로마 역시 희극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는 마초키 Virgilio Mazzochi와 마르코 마라촐리 Marco Marazzoli가 작곡한 <고통받는 자에게 복 있으라 Chi soffre speri> 로 1637년 바르베리니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선은 탄생한다 Dal male il bene>인데 여기서 이미 18세기 희가극에 자주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하인과 그 밖의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몬테베르디가 베니스에서 최후의 두 오페라가 있는데 주제는 그리스의 고전문학 <율리시즈의 고국으로의 귀환>과 고대 로마 역사 <포페아의 대관 L'Incoronazione 야 Poppea>에서 빌어왔다. 특히 후자는 그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오페라에 대한 베니스인들의 열광은 끝이 없었으며 1637년에서 1700년 사이에 적어도 16개의 극장이 세워졌으며 상연된 오페라만도 그 수가 1백 편에 가까웠다.

17세기 중엽에 이름을 떨친 피에르 프란체스코 카발리는 몬테베르디의 제자였다. 오페라 음악의 몇몇 장면들이 보다 확고한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의 손을 통해서였다. 그의 오페라 중에서도 오르민도<L'Ormindo>와 칼리스토<La Calisto>는 계속하여 재상연 되었다.

베니스의 오페라는 제작비용 절감을 위해 배역을 6~8명의 가수로 한정하고, 코러스는 전면 삭제되거나 노래가 필요없는 단역으로 축소되었다. 오케스트라마저 단출한 현악단으로 통일되었지만 무대장치는 궁정의 연회에서 보는 것 같은 화려함은 줄였으나 그를 제외한 장치들은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 세기의 60년 동안 오페라는 순전히 음악적인 측면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륄리(Giovanni Battista Lulll)/ 출처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륄리(Giovanni Battista Lulll) (출처=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륄리(Jean-Baptiste Lully)에서 대혁명까지의 프랑스 오페라

이탈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축제나 향연은 왕족의 생일이나 혼인 그리고 공식적인 외국 방문 같은 국가 행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 연회의 대부분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지만 단 하나의 예외로 <루아느의 희극적 무도극>은 규모, 의상, 무대배경, 음악 면에서 극적인 요소가 두루 갖추어져 있었고 스토리의 전개 역시 발단, 긴장, 해결이라는 일관성 있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 오페라의 향방을 알게 해 준 것은 아니다.

1659년 시인 피에르 페렝은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와 합작으로 <이시의 전원극 La Pastorale d'Issy>를 내놓았다. 이 극은 목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극의 정상에 도전하는 프랑스의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 후 1671년 그와 캉베르는 프랑스 최초의 오페라라 할 수 있는 <포모나 Pomone>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은 륄리의 강력한 개성에 맞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륄리(Giovanni Battista Lulll이탈리아식 이름) 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14세 때 몽팡시에 영양에 고용되어 파리에 도착했다. 무용수와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은 넘쳐나는 에너지와 진지한 야망 권모술수에 힘입어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가 17세기 프랑스 음악에 끼친 영향은 18세기 영국 음악에 헨델이 끼친 영향에 가히 필적한 만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프랑스 극음악은 발판을 가지게 되었다.

륄리는 또한 프랑스 연극계의 가장 뛰어난 무용수이자 배우였고, 극작가였던 몰리에르와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는데 그들의 유대로부터 노래, 춤, 희극, 웅장함이 혼합된 <코미디 발레 Comedie-Ballet>라는 새로운 개념이 탄생되었다. 륄리는 <강제결혼 Le Mariage force>, <엘리드의 왕비 La Princesse d'Elide>, <서민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 같은 작품에서 몰리에르의 기지에 어울리는 경쾌하고 우아한 터치의 음악을 보여주며 코미디 발레는 후일의 희가극의 선조가 되고, 다음 단계의 프랑스 오페라와 직접 연결된다.

그후 륄리는 <카드무스와 헤르미오네 Cadmus et Hermione>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것은 필립프 퀴노와 합작으로 쓴 장편의 오페라 시리즈 중 푀포의 작품이었다. 이것과 그뒤의 작품들 <알체스테>, <아티스>, <프로세르피나>, <아르미드>등에서 륄리는 그 후 약 1백 년 동안 계속될 프랑스 오페라의 양식을 확립시켰다.

이른바 륄리 풍의 <음악으로 된 비극 Trageie en musique>의 진수는 서창조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륄리는 불어의 억양을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극적이거나 혹은 시적인 내용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서창조의 음악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아리아는 이탈리아의 아리아를 그대로 흉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갖는 힘과 체계적인 음악성은 갖추지 못했다. 반면에 춤은 거듭 강조되어 이후 프랑스 오페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춤과 마찬가지로 코러스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묵직한 하모니로써 극에 위엄과 장중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

오케스트라 역시 륄리에 힘입어 카발리 시대의 기본 입장을 뛰어넘는 새로움을 획득하게 되었다. 서곡이 갖는 의의도 그에 못지않게 차차 커져갔고 느림-빠름의 <프랑스식 서곡 French overture>을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를 확연히 구분 지었던 차이는 비가극의 소재 선택에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이나 네로 등 과거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에서 영감을 찾았으나, 프랑스인들은 실제 인물이 오페라 상연에는 걸맞지 않다 하여 신화나 전원시, 혹은 중세 기사도 문학 등에서 끄집어냈다.

이런 륄리의 예는 후계자들에 의해 글루크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관습적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륄리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라 할 수 있는 장 필리프 라모의 32편의 무대공연 작품들 역시 그러하였으나 불행히도 라모는 오늘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라모의 오페라는 가수와 오케스트라 둘 다를 의식한 직선적인 작곡에서 우러나온 힘과 풍부하고 다양한 화성을 통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적 분위기는 음성과 오케스트라의 몇몇 독립적인 음색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이루게 짜여졌다. 코러스도 대위법적인 그물망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귀족계층에서 다소 딱딱한 형식적인 연예물이 한창 절정을 이룰 즈음 서민계층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실수극 comedy of errors>이 상연되고 있었다. 초창기의 공연은 주로 장터나 천막에서 이루어졌는데 차츰 생 로랭이나 생 제르맹 같은 보다 큰 장을 중심으로 영속적인 가설무대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엽에 이르면 <오페라 코미크 Opera-comique>란 타이틀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오페라 코미크는 대중들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모았는데 특히 퓌젤리에르와 르 사주가 합작하기 시작할 때부터 더욱 그러했다. 모든 난점들이 해결되고 보다 완벽하며 보다 풍요로운 발전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을 1762년 2월 3일, 오페라 코미크와 코미디 이탈리엔느 극단이 공식적으로 합해진 근 40년 후의 일이었다.

가락에 맞춰 부르는 노래들이 간간이 삽입되는 이들 극장 특유의 <통속 희극들pieces en vaudevilles>은 후에 영국에서 게이와 페푸쉬에 의한 <거지들의 오페라 The Beggar's Opera>비롯, 독일의 <소사극Singspiel>에서 볼 수 있는 극 형식을 마련해 주었다. 또 이탈리아 아리아를 풍자적으로 개작한 그들의 아리에타 작품들은 19세기 오페레타와 오펜바흐의 길을 다져주었다.

 

디도의 죽음/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출처 네이버백과사전
▲디도의 죽음/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출처= 네이버백과사전)

퍼셀에서 안에 이르는 영국 오페라
 
런던에서 최초의 민간 오페라 극장이 설립된 시기가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1639년 윌리엄 데브넌트 경은 <음악과 음악적 공연물, 춤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작품들을 발표> 할 수 있는 극장 설립 허가권을 획득해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때부터 음악은 무대공연에 동참해 왔는데, 그 이후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극에 대응하여 고안된 가면극(maque)이 만들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궁정 연회에서 유래한 가면극은 1605년 경에서 1620년에 이르는 제임스 1세 통치하에서 그 절정을 맛보았으나 현재는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버렸다.  

영국에서 작곡의 아버지라 불린 헨리 퍼셀은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작품은 그 후로도 한두 차례 재 상연되기는 했으나 음악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1668년 데브넌트가 세상을 떠난 후 새 극작 도싯 가든 극장이 문을 열고 이 극장은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 연극계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페라 하우스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상연된 셰드웰에 의한 셰익스피어극의 각색 혹은 각생을 넘어선 곡해를 비롯, 그 외의 여러 작품들이 퍼셀의 음악 덕분으로 오페라의 영역에 흘러들어갈 수가 있었다.

1673년 도싯 가든 극장에서 상연된 작품 하나로 셰드웰의 <사이키 Psychy>가 있었는데 이 작품은 1671년에 몰리에르와 룰리에 의해 제작된 동명의 <희극적 무도극>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덴트는 <영국 오페라의 토대>에서 이들 음악의 몇 부분을 수록하고, 록의 곡이 과거 셀리의 가면극<큐피드와 사신>에서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반면 셰웰드의 작품는 극과 무대장치와 음악이 거의 바그너의 음악에서 보는 것처럼 전체에 녹아들어 세 가지 예술이 따로따로 떨어져서는 결코 낼 수 없는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당시 작곡가들이 서창조의 음악을 취급하는 데 있어 자신감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가면극이라는 설명은 붙었지만 정작은 축소판 오페라라고 볼 수 있는 존 블로의 <비너스와 아도니스>라는 경쾌한 목가극에서 잘 나타났다.

17세기 영국에서 다른 걸작품들과 견줄 만한 작품은 헨리 퍼셀이 음악을 맡고 내이험 테이트가 대본을 쓴 <디도아 아이네아스>였다. 이 작품의 악보는 유실되었고 작품 공연시기도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1689년에 상연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이키>나 <로우드즈의 점령>은 세미 오페라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퍼셀의 <디도>만큼은 오페라라는 타이틀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 <디도>로 인해 눈부신 창조시대의 막이 열리데 되었고 6년 동안 퍼셀은 40여 편에 이르는 극작품을 작곡되었다. 이들 중 최초의 작품은 <다이오클리지언 Dioclesian 1690>으로 오페라라고 하기보다는 춤과 음악 화려함이 가미된 <영웅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다음 해에 나타난 <아서 왕 영국의 영웅>이란 작품은 오페라적인 이상향에 보다 가깝게 다가간 작품이었다. 작가는 존 드라이든으로 영국의 뛰어난 문필가 중에서도 오페라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했던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극적 오페라라는 작품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17세기 영국 무대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드라이든과 퍼셀의 목표는 영국에 진정한 오페라를 확립시키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퍼셀은 1680년대에 그가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이탈리아 음악을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적용시켰고 그리하여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탈리아어라면 단어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을 만큼 철저한 영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가수들의 인기로 인해 침투는 서서히 이루어졌다. 1711년 헨델의 <리날도>가 런던에서 상영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가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헨델은 비가극의 전통에 있어서 뛰어났지만 오페라 역사에 있어 그가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여러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헨델은 스타일도 구성 형식도 언어 자체도 그가 귀화한 나라와는 전혀 색다른 35편의 오페라로 30년 동안 런던의 음악 무대를 휩쓸었다. 대중들의 반간과 무관심에 헨델과 동료들은 보다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후에 존 게이와 존 크리스토퍼 페푸쉬의 <거지 오페라>가 오페라 계를 완전히 뒤집는 이변을 일으켰고 그로인해 우리 시대 이전까지 존속하게 될 새로운 유형의 음악 오락물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것 때문 만에 헨델이 몰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헨델은 오페라에서 손을 떼고 영국식 오라토리오로 눈을 돌렸다. 또한 그는 그 분야에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영국 본토박이 작곡가들 중에서는 토머스 어거스틴 안이 가장 활발한 활동 양상을 보였다. 안의 진정한 재능은 보다 가벼운 쪽, 소박한 시골풍의 코미디에 있었다. 희가극은 18세기를 통틀어 늘 인기를 끌었다 <거지 오페라>이후 10년 동안 1백 편이 넘는 발라드 오페라가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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