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컬처타임즈

유틸메뉴

UPDATED. 2024-04-20 10:16 (토)

본문영역

[컬처타임즈 윤온유 칼럼]두 번째 이야기) '호통' 아닌 '소통'
상태바
[컬처타임즈 윤온유 칼럼]두 번째 이야기) '호통' 아닌 '소통'
  • 윤온유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07 10:00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 / 픽스베이>

 

“우리 애는 도통 얘기를 안 해요.”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얘기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하는 어머님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물어보면 대충 대답하거나 피하거나 한다며, 아이에게 물어봤자 답이 없으니 어린이집에 자꾸 물어볼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아이에게 어떤 것을 물어보세요?”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은 없었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친구들과는 잘 지냈는지, 선생님과는 어땠는지, 여러 가지 물어보지요.”

 

여기서, 나는 생각했다. 
아이가 저 질문에 다 대답하려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할까, 
그리고 저 엄마의 질문에 엄마 자신은 어떤 대답을 원하고 있을까.
아이가 대답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어떻게 분별할까.


“아, 그러면 아이가 대답할 시간은 얼마나 주세요?”
“시간을 주면 대답을 안 하니, 자꾸 물어보게 되요.”

“어머니, 만약에 어머님이 원하시는 대답을 안 하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어떻게 있었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

 

아이들은 이렇게 답하더라.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엄마는 화를 내요.”

 

아이와 소통하고 싶어 하고, 아이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어떤 친구와 놀았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놀이를 진행했는지 질문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만 소통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하루의 시간을 누구보다 사실적이고 역동적으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기법을 활용하여 이야기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 픽스베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그 이야기보따리를 신나고 행복하게 풀어내는 것보다는 왠지 피하고, 걱정스럽고 많은 생각을 하다가

 

“몰라”, “생각이 안나” 라고 대답을 한다.

 

그렇다면 왜, 아이는 이야기를 거부하고, 부모가 원하는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 걸까?

 

첫 번째, 소통은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해한다’를 뜻하는 영어단어인 “Understand”는 Under(밑) ; 그 사람의 밑에서, Stand(서다) ; 서야, 한다는 합성어로 그 사람의 밑에 서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의 위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한 이해가 아니다. 온전히 그 아이의 밑에서 그 아이의 사고로 그 아이가 나를 보며 느낄 감정에 대해 정확히 보는 것을 말한다. 권위적이거나 내 중심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한다면 심리적 거부감으로 인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이 대답이 맞는 건지 등 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지에 대해 걱정하느라 시간이 가게 되고 점차 대화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어떤 대답을 하든지, 어떤 상황이었든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아이가 느꼈다면 부모가 원하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소통을 시작하게 만들 수 있다. 

 

두 번째, 소통은 과정이 중요하다. 
회복 탄력성의 저자 김주환은 원래 소통, 즉 Communication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 ‘communicare’로. 이말은 ‘공유한다’ 또는 ‘함께 나눈다’는 뜻을 설명하면서 명사형으로는 ‘communis ’이고 ‘함께 나눔’ 혹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란 뜻이라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나눠 먹는 성찬식(communion) 역시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소통의 원래 의미는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보다는 어떠한 경험을 함께한다는 뜻, 즉 공통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곧 소통이라는 것이다. 소통은 상대와 함께 공통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데 있어 직간접적으로 하는 모든 대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와 함께 하는 소통도 여기에 함께 포함된다. 
우리의 소통이 아이의 하루 생활에서 아이의 시간을 공통의 경험으로 나누고자 하는 데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친구와는 잘 지냈는지에 대한 내용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가 아침에 가서 보았던 개미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아주 뜬금없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이야기하는 것, 신나는 동요에 맞춰 춤을 추었던 기억을 말하는 것 등 아이가 함께하고 싶어하는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소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소통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대화의 흐름이 바뀌면서 아이들과 즐거운 소통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소통의 과정은 함께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데 있다.

 

세 번째, 소통은 결과를 낳는다.
아이와의 즐거운 소통을 하기 위한 시작이 호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소통은 결과를 낳는다. 소통의 시작이 어떠했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마무리이다. 소통의 결과가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수용적 태도의 비언어적 요소와 결합한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며 진취적인 언어사용에 있다. 
아이들에게 질문할 때부터, 부정적인 요소로 질문하면, 그 질문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기분 나쁜 것을 생각해야 하는 질문’으로 각인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화의 질도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고, 어느 순간 소통은 호통의 결과를 낳을 수 있게 된다. 가르치기 위한 대화, 소통을 빙자한 아동의 행동수정을 위한 호통이 되어버리는 상태가 된다면,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소통 불가능의 아이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통의 결과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서로를 존중하는 결과로 도출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실천해보자. 
아이를 만났을 때, 아이가 교육기관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질문을 한다. 그때 이렇게 질문해보자.

“뭐하고 놀았어? ”  > “어떤 재밌는 일이 있었어?”

“누가 괴롭히진 않았니? ” > “누굴 가장 사랑해주었니?”

“밥은 잘 먹었어?”  >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었니?”

소통의 주체를 “아이”로 바꿔보자. 
무엇을 했는지, 누가 했는지보다 “어떻게” 했는지를 물어보자. 
아이에게 대화를 이끌어 낼 때, 아이가 한 일들은 너무나 많기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면 그 무엇을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어진다. 
그래서 어떤 놀이가 가장 기억이 나는지, 그 놀이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물어보면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출처 / 픽스베이>

 

또한 아이에게 오자마자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묻는다면 굳이 당하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자신의 잘못보다는 “다른 누구”에게 초점이 되기 맞춰지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설명할 “나를 괴롭히는 누구”를 대화의 주인공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 하루에 내가 반드시 집에 가져가야 할 과제가 되어버릴 수 있다. 
누구와 지내고자 하는 주체가 “아이”가 되어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줄 수 있도록 그래서 얻는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질문해주는 긍정적 질문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여부를 묻게 되면, 집에서도 하는 의식주 생활이 밖에서 무조건 해야 하는 숙제가 되어 밥을 제대로 먹지 않거나, 낮잠 시간에 잠이 안 왔다면 기본적 의식주에 대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한 “죄의식”을 가지고 부모 앞에 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잘못한 것이 아닌 문제가 ‘잘못한 것’으로 인식되어 질문했을 때 이미 얼굴이 어두워지거나 아닌 말로 ‘거짓말(예: 김치도 다 먹고, 국물도 다 먹고 밥도 다 먹었어)’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아이들은 누구나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먹었느냐는 질문보다, 어떤 요리나 음식이 기억이 나는지, 그 요리는 어떤 맛이었는지 그 음식을 먹은 경험을 물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이 외에도 우리는 많은 질문을 아이들에게 할 것이다.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반드시 우리 아이에게 해야 할 질문인지 2초만 생각하자. 
우리가 하는 언어가 이 아이가 가야 하는 곳에 문제를 찾고, 과제를 해야만 하는 수동적으로 만드는 언어인지, 현장을 능동적으로 주도하게 만드는 언어인지 한 번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내가 하루에 있었던 모든 일을 시시콜콜 말하며
부모님의 칭찬 한마디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고, 부모님의 호통 한마디에 주눅 들기도 했던,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였을 때를 생각하고,
우리가 놀이터를 가기 전, 유치원에 가기 전, 어린이집을 가기 전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말 들을 생각 하면서, 나는 우리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잘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이였을 때 듣기 좋았던 그 말은 현재 우리 아이들도 좋아하는 그 말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처럼.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 독자분들의 후원으로 더욱 좋은 기사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남한기 2019-06-07 20:46:22
다음글도 매우 기대됩니다. 향방 있는 칼럼 많은 시람들이
봤으면 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김은진 2019-06-07 12:55:45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지금도 아이처럼 살고싶은 엄마입니다~ 오늘도 많은걸 배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김수진 2019-06-07 12:38:18
배움이 많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하단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