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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의 컬처차이나] 중국의 '흑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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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의 컬처차이나] 중국의 '흑인'들
  •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 승인 2020.08.0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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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한다.

“제발, 제발, 제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식당 보안요원 일을 하던 조지 플로이드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백인 경찰은 그를 연행하면서 5분 동안 뒷목을 눌러댔다. 플로이드가 떠난 지 두 달이 더 지났지만, “숨을 쉴 수 없다”던 그의 마지막 외침은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종은 미국을 가르는 가장 예민한 문화적 기준이다. 힘(power)을 가진 백인은 마치 그 힘을 하늘에서 내려받은 듯 행동하면서 흑인을 자신과 다른 집단으로 내몬다. 흑인은 백인과 다른 사람이 된다. 타자화(otherization)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 이들은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어느 사회나 ‘흑인’이 있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나누는 가장 예민한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 사회의 ‘흑인’이 드러난다. 지금 한국 사회의 ‘흑인’은 여성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고,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 “숨을 쉴 수 없는” 마지막 절규를 외치는 이들과 그들의 목을 짓누르는 ‘백인 경찰’도 여전히 같은 장소 안에 있다.

중국 사회의 ‘흑인’은 누굴까. 중국 사회를 가르는 가장 예민한 기준은 무엇일까. 중국인 친구 서넛에게 물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소수민족! 중국어로 ‘민족’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종족’(ethnic)에 더 가깝다. 중국은 “1개 다수민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다수민족은 한족(漢族)이다. 55개 소수민족은 중국 정부가 ‘공인’한 경우다. ‘공인’되지 않은 민족도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이들은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소수민족이라는 이름부터 문제다. 평생을 살아도 만나기 어려울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 그 땅에서 오랜 세월 자기의 말과 삶과 문화를 지켜온 사람들을 뭉뚱그려 소수민족이라고 부른다. 55개 안에 들어 있을 저마다의 개성은 한 마디 이름으로 사라져 버린다. ‘다소’는 숫자에 따른 구분이다. ‘소수’는 그 인구를 다 더해도 한족에 훨씬 못 미친다. 한족이 13억인데 ‘소수’는 1억 2천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차지하는 땅은 훨씬 넓다. 만약 생각을 바꿔 이들을 ‘대지(大地)민족’이라고 부른다면 또 어떨 것인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소수민족 / @바이두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소수민족(출처/ 바이두)

중국도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이 차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헌법 서문에는 중국이 “전국 각 민족 인민이 함께 만든 통일된 다민족 국가”라거나 “대민족주의, 대한족주의, 지방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전국 각 민족의 공동 번영을 추구한다”라는 선언을 못 박았다.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 민족 단결을 파괴하거나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각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자유, 자신의 풍속과 관습을 유지할 자유”도 중요한 조항으로 밝혀 두었다.

한족이 다수인 사회에서 ‘소수’의 반발을 잠재우고, 잠재된 저항의 싹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한족이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할 때도, ‘소수’는 두 아이 이상을 가질 수 있었다. 상급 학교 진학 시험에도 가산점을 주었다. 당근으로 이들을 달랬지만, 신장성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은 여전히 분리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위구르족 회교도(무슬림) 여성이 머리에 두르는 부르카, 남성의 전통적인 수염 스타일을 금지하고, 새로 태어난 아이의 회교식 이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걸리면 공개 처형되기도 한다. 시험 가산점은 스멀스멀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수민족’이 들어간 글이나 학술논문은 퇴짜를 맞기 일쑤다.

문화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선언은 삶이 되지 못하고 구경거리로 전락하기 일쑤다. 우리 국회에 해당하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는 특별히 소수민족 출신 위원을 배정한다. 해마다 전체 회의가 열리는 날 소수민족 대표들은 각자 전통복장을 입고 등장한다. 미디어는 이들의 ‘다양한’ 스타일을 찍어 나르느라 여념이 없다. 거듭되는 대상화와 타자화, 눈에 보이는 억압과 알려지지 못하는 차별이 그들의 삶이고 문화다.

중국 사회에서는 “네 신분이 뭐냐”라고 물을 때, 늘 민족을 기입하게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신분증은 이름 바로 아래 성별과 민족을 나란히 쓴다. 우리 사회는 요즘 “성별이라는 신분의 구별도 과연 필요한가”, “성별은 과연 남과 여, 둘뿐인가” 하는 물음을 시작했다. 어떤 기업은 아예 이력서에 성별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 상황을 미루어보면, 성별에 이어 민족을 기입하는 신분증은 더 힘이 세다.

중국의 신분증 / @바이두
▲중국의 신분증 (출처/바이두)

구별된 집단을 힘으로 눌러 똑같이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의 문화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헌법 조문은 어떻게 삶이 되지 못하고 문자로만 남는가. 문자로라도 남길 수 있다는 건, 그나마 의식이 거기에 이르렀다는 말일 테니, 그쯤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문자는 때로 현실을 위반한다. “책을 읽읍시다”라는 구호는 정작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 도대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이런 구호가 헌법 조문을 장식한단 말인가. ‘소수’의 목을 졸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기획은 어쩌면 두려움의 발로다. “하나의 대 가족”인 중국이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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