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컬처타임즈

유틸메뉴

UPDATED. 2024-03-18 18:16 (월)

본문영역

[기획인터뷰] 판소리의 대가 국창 신영희①, "판소리의 유파가 사라지는 것은 전통문화의 큰 위기다."
상태바
[기획인터뷰] 판소리의 대가 국창 신영희①, "판소리의 유파가 사라지는 것은 전통문화의 큰 위기다."
  • 백석원 기자
  • 승인 2021.03.16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전통문화 예술 장르이다.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와, 말, 너름새 속에 지식층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를 담고 있다. 판소리는 조선시대 서민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판소리의 창자는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전수받고 전통을 계승하기위해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내용을 암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성있고 구성감있는 음색을 터득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혹독한 수련을 거친다. 조선시대  많은 인기를 누린 반면 한국이 급속하게 현대화되면서 판소리는 위기에 처했으며 쇠퇴해 가는 판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64년 국가가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하게 됐다. 무형문화재 지정이 되어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국가 지원에만 의존하고 관심밖의 장르가 되어 전승해 나가는 사람이 없어지면 더이상 계승이되지 않고 전통이 단절되는 일도 발생한다. 이에 전통문화를 진흥하고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이끌며 전수해 나가는 일이 중요한데 이러한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 있어 본지는 전통문화의 재발견이라는 기획하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주]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 ⓒ컬처타임즈

국악인 신영희는 현재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이며 한국 판소리보존회 이사로 공연과 전승활동을 왕성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1987년 KBS 쇼비디오자키 '쓰리랑부부'에서 김한국, 김미화와 함께 판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온 마당극 형식의 코너에서 국악인 신영희씨가 앉아 북을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고 코너의 시작이나 마무리를 알렸다. 코너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KBS의 최고 개그 코너가 되고 그로인해 판소리도 대중에게 친숙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당시엔 국악이 엄격하다보니 국악인이 개그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 김소희 스승의 만류와 주위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국악인으로서 판소리로 대중과 호흡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적 역할을 한 국창 신영희와의 인터뷰를 통해 판소리의 수련 과정과 그녀의 인생 그리고 유파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의 판소리의 위기에 대해 들어본다.

판소리의 시작과 소리 공부 과정

Q. 국악의 대중화를 이끈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이며 끊임없는 열정과 도전으로 활동한 우리나라 신여성의 한 분인 국창 신영희님 독자 여러분께 인사부탁드립니다.

A. 국창 신영희 : 안녕하세요. 소리를 69년째 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결혼생활, 사업 이런 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외길 인생으로 소리를 70년 동안 해온 신영희입니다. 그야말로 조금 전에 신여성이라 그랬는데 저 사실 신여성입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한테도 생각이 안 떨어집니다. 제자들과 대화할 때도 똑같이 하는 신여성입니다.

Q. 국악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는?

A. 국창 신영희 : 예전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단체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전국 순회공연하면서 다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진도가 고향이고 아버지는 담양이 고향이신데 객지에서 두 분이 만나서 결혼하셨습니다. 중매를 쑥대머리 잘하시는 임방울 선생님께서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서 40대에 진도로 어머니가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진도에서 아버지께서 소리를 전파를 시키셨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보자기에 책을 싸서 매고 집에 오면 방에 제자들이 찾아와서 판소리를 공부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가만히 듣고있자니 친구 아버지셨는데 목은 좋으신데 어떻게 따라서 못하시는지, 몇 번 해도 그 소리를 못하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굉장히 쉬운것 같은데 못하셔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른이 돼서 그것도 못 하냐고 했더니, 네가 그럼 해 봐라하셔서 했습니다. 친구 아버지께서 "너 소리를 언제 배웠냐?" 여쭈어보셔서 밖에서 지금 듣고 배웠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소리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실은 여성이 이 길이 너무 험난합니다. 옛날에는 여성 명창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협률사 단체에서도 여성은 소리를 별로 안 하시고 돌아가신 옛날 박녹주 선생님이 그래도 다니면서 하셨는데 판소리 하신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설득하셨습니다. 시골에서 그냥 초등학교 나오고 중학교 나와서 결혼하느니 명창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 하셔서 저 때문에 진도에서 목포로 이사도 하셨습니다. 목포에서 학교 다니다가 '에라 못쓰겠다. 소리만 하자.'고 그래서 중퇴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소리를 정말로 열심히 했고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회의를 느끼거나 '아이고 내가 이걸 왜 했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나이가 젊으면 어디 산에 들어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Q. 연습을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하십니까?

A. 국창 신영희 : 학생들을 계속 가르칩니다. 오늘은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많이는 못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요즘에는 혼자서 집에 와서 공부하고 혼자서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합니다. 계속 가르치고 공연 다니고 합니다.

Q. 어렸을 때 별명은?

A. 국창 신영희 :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옛날에 공부하는 것이 진짜였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공부합니다. 저는 이제 목포에서는 유달산 다람쥐로 별명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사이렌이 있었는데 새벽 4시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듣고 플래시를 들고 유달산 유성각 밑에 조그마한 굴에 올라가서 소리를 두어 시간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아침밥 먹고 한 10시부터 또 소리 시작하고, 11시 반이나 되면 끝나고 점심 먹고 또 시작하고 저녁 먹고 또 시작하고 하루 종일 소리만 합니다.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 ⓒ컬처타임즈

Q. 득음 과정에서 인분을 드셔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A. 국창 신영희 : 14살 되니까 목이 쉬더니 열악한 몸에 시골에서 목포에서 뭐 얼마나 잘 먹겠습니까? 어머니가 솜씨가 좋으셔도 고기 같은 것은 안 먹고 계란이나 먹었습니다. 소리를 너무 해가지고 목이 쉬고 살결이 막 아팠습니다. 다른 음악도 힘들겠지만 다른 음악은 두성으로 많이 하지만 우리는 코도 써야 되고 코 음도 나와야 되고 이마에서도 나와야 되고 뒤통수에서도 나오고 목젖, 목, 가슴, 배 다 나오고 다 다릅니다. 

요즘 공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막 소리만 지르고 소리만 지른다고 소리가 아닙니다. 감정이 있어야 되고 관객들을 울렸다 웃겼다 해야 합니다. 소리를 하면 울릴 때는 울려야 하고 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감정을 슬픈 데에서 감정을 넣어야 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만큼 많이 해야 된다는 이야기이고, 소리를 많이 해서 목이 1년 동안 안 터지는데 어른들 말씀을 들으니까 인분을 먹으면 좋다고 해서 인분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목이 터진 것은 아니고 몸이 약해지니까 어혈에 좋습니다. 살가죽도 아프고 뱃가죽도 아프고 그래서 한참 인분을 먹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분은 안 먹고 저까지 아마 먹었을 겁니다.딱 장독에다가 이렇게 물 조금 넣고 보자기로 싸서 놔두면 서리 맞으면서 불어나고 아침에 노랗게 된 것을 먹었는데 멍청한 짓입니다. 체 독 걸려서 안 좋고 그 전에 선생님이나 선배들이 좀 먹고 소리 좀 하셨다 하는 양반들이 남자분들이 많이 드셨답니다. 

여자들은 안 먹었습니다. 나나 되니까 소리 미쳐서 먹었습니다. 소리에 대해서 무조건 해야 된다는 책임감일까?

Q. 발모양이 다른 사람과 다르십니다?

A. 국창 신영희 : 네. 이제 공부하면서 때때로 나가서 어차피 나가서 소리를 하니 도서 지방 같은 곳에서 잔치 있고 그러면 그런 데 가서 노래했습니다. 11살 때부터 버선을 너무 많이 신어 가지고 저는 발가락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붙었습니다. 옛날에는 버선을 안에다가 종이를 딱 놓고 꽉 끼게 신었습니다. 방을 굴러다니면서 신고 벗을 때도 막 억지로 벗고 발이 예뻐야 한다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이렇게 버선 모양으로 된 발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도에서는 아버님 살아 계실 때 11살 12살 애기 때 소리를 잘하니까 아버지께서 동네 친구한테 전화해 가지고 저를 데리고 가셔서 소리 시키고 한 8~16KM를 걸어서 다녔습니다.뭐 달구지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없죠 버선 신은 채로 걸어가서 소리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포 나왔을 때 아버님 돌아가신 뒤로 어쩔 수 없이 도서 지방 같은 곳에서 가서 소리를 했습니다.

Q.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가정 생계를 책임지시고 위로 오라버니의 공부, 어머니, 동생까지 책임을 지고 가장 역할을 하셨는데 여자로써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16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 수 없이 제가 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때는 남자한테 별로 일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성분들이 서울 구로동으로 공장에 있으면서 돈 벌어서 집으로 부쳐서 그것 가지고 밭 사고 논 사고 살았습니다. 그때 시절에는 여성들이 벌이가 더 좋았고 할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때는 남자들이 들어갈 데가 없고 취업할 곳이 없었습니다. 아무거라도 해서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심정들이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목포와 명창

Q. 소리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그때는 소리 하신 분들이 서울에 별로 없었습니다. 경기도 서울에서는 알아주지도 않고 전라도에서 소리를 많이 알아주니까 전라도로 많이 유명한 선생님들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 한쪽에는 노인정 한쪽에는 국악원으로 밥 잡수고 그리고 주무시고 그런 선생님들이 한 2년씩 계시다 가시고 그 틈을 타서 선생님께 하루도 빼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 오래 못 있으시고 또 가시고 다른 선생님 또 오시고 했습니다. 강도근 선생님도 한 2년 계시다가 가셨다가 또 오시고 그랬습니다. 강도근 선생님께도 많이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제가 여덟 분 정도 됩니다. 우리 아버지, 장월중선 씨, 안기선 씨, 최유란, 최유란 씨에게 역사를 많이 배웠습니다. 안중근 사기나 유관순 전을 많이 배웠습니다. 또 강도근 선생님, 김상용 씨, 박봉술 씨 포함해 여덟 선생님들이 목포로 찾아오셔가지고 배웠습니다. 그때는 갈 데가 없으니까 목포는 그래도 소리 고장이고 알아준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목포로 찾아오셔서 거기서 그냥 2년 3년, 그러다 보니까 선생님을 여러 분 만났습니다. 이후에 김소희 선생님을 만나서 배웠습니다.

Q. 당시 유명했던 명창도 생활이 쉽지 않으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정착할 데가 없으니까, 갈 데가 없으니까 오신 겁니다. 박봉술 씨도 그 뒤로 무형문화재가 되셨고 가야금 잘하시는 장월중선 선생님도 경주에서 문화재가 되셨고 강도근 선생님도 문화재가 되셨습니다. 유명한 소리 잘하시는 선생님들은 인정은 받았지만 모두 문화재로는 안됐습니다. 63년도에 문화재법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화재법이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 ⓒ컬처타임즈

 

위기의 판소리, 유파가 사라지고 있다.

Q. 문화재법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부분입니까?

A. 국창 신영희 : 유파를 없애면 안 됩니다. 유파는 소리의 선생님을 말하는데 유파가 없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계보가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 전통을 찾으려고 계보를 찾으려고 이렇게 전통을 찾는 데 유파를 없애면 되겠습니까? 작년부터 문화재 법이 개정됐는데,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면 선생도 없고 제자도 다 없어지는 겁니다.

이거 이거 큰일 났습니다. 이렇게 유파가 없어지면, 계보가 없어지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항간에 어떤 분들이 나이가 어려도 소리를 잘하면 문화재로 지정해 줘야 된다고 하는데 소리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차분하고 어른이 돼야지 어른이......

육십은 돼서 사십 대 되면 되겠습니까? 문화재가 소리도 소리지만 인간이 살면서 겪을 일 다 겪고, 슬픔, 괴로움, 외로움 이렇게 겪으면서 어렵게 사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소리를 해야지그래야 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한도 있고 즐거움도 있습니다.

한이 없는 사람이 즐거울 수가 없고, 즐거움이 없는 사람은 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 소리만 빽빽 지르면 뭐합니까? 인생도 살아야 되고, 요즘 세상에 슬픔이야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또 슬픈 일이 있습니다. 편하게 사는 사람 없습니다. 저기 대궐 속에서 슬픔이 있고 12칸 기와집에서도 슬픔이 있듯이 왜 없겠습니까? 자식이 없어 슬프고, 옛날 같으면 아들이 없어서 슬프고 아들만 있어서 딸이 없어 슬프고 왜 슬픔이 없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국악인 신영희는 유파가 사라져 가는 현 시점의 판소리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 이어 너무 이른 나이에 문화재 지정이 되는 것에 대해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고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시기가 됐을 때 지정이 되어야 한다고 문화재 지정에 대한 경험에서 나오는 의견을 표명했다.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 독자분들의 후원으로 더욱 좋은 기사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하단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