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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대한민국 대표 명창 신영희②, "코로나로 힘든 국악인들 낮에는 국악, 밤에는 배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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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대한민국 대표 명창 신영희②, "코로나로 힘든 국악인들 낮에는 국악, 밤에는 배달합니다."
  • 백석원 기자
  • 승인 2021.04.02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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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인생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한평생 소리꾼 국창 신영희
국창 신영희와 영화 '서편제'의 오정해

앞선 국창 신영희와의 인터뷰에서는 소리 인생과 유파가 사라져가고 있는 판소리의 위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어 2화에서는 1980년대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국창 신영희의 이야기와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이 끊긴 국악인들의 현실에 대해 말한다.[편집자주]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 ⓒ컬처타임즈

계속된 인터뷰에서 국창 신영희는 1981~82년도 국악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다시 대중에게 사랑받는 예술장르로 만들고자 국악인들이 KBS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늦은 밤까지 동고동락하며 전통 국악을 살리려는 의지로 연습을 이어나갔던 일화를 전했다.

국악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인고의 노력

Q. '쓰리랑부부'프로그램 이전에 국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어떠했었나? 

A. 국창 신영희 : 1981~82년도 쯤이었습니다. 국악을 살리려고 KBS 땅바닥에 자리 깔아 놓고 다 퇴근한 뒤로 밤 12시까지 연습하고 그랬습니다. 국악인들이 한 20~30명 앉아서 음.. 조상희 씨, 돌아가신 남해성 씨, 한동선 씨, 또 여기 김동현 씨, 강정숙 씨(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국가무형문화재 많이 돌아가시고 산 사람이 지금 조상희씨, 강정숙 씨도 건강하시고 그런 분들이 국악을 살리려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국악만 틀면 돌려 버립니다.  그때는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여전히 국악에 대한 관심은 차갑기만 했고 그러던 와중에 '쓰리랑부부'라는 개그 프로그램을 만난다.

Q. '쓰리랑부부' 촬영은 어떠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처음에는 아리랑 남매를 했었습니다. 남매를 하니까 재미가 없고, 무의미해서 쓰리랑부부로 하자하고 부부로 했습니다. 부부로 하니 인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그 시간대에 길에 가던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가서 보고 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김미화, 김한국 씨가 둘이 아주 머리싸움을 하는데, 너무너무 둘이 영리하고 머리들이 좋습니다. 대본을 만들어 가지고 둘이서 하는 데 한 번은 정말 내가 너무 웃어가지고 펑크를 냈습니다. "웃고 하자. 아주 많이 웃고 하자. 내가 너무 웃어서 안 되겠다."했는데 방송에 그것까지 그대로 내보낸 PD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대본을 써 주셨는데, 나중에는 대본 컨닝을 자꾸하니 눈 모양이 이상해지고 북에다 올려놓아도 이렇게 눈이 내려가고 옆에다 놓으면 또 눈이 가고 그래서 한 1년 하다가 제가 하겠다고 그래서 제가 애드리브로 진행했습니다. 남녀 구분 구별없이 남자가 잘못하면 야단치고 여자가 잘못하면 여자한테 야단치니까 딱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이쪽 저쪽을 싸움을 말리면서 나쁜 짓 하거나 안 좋으면 떼어 말리니까 대중들이 남자들도 좋아하고 여자들도 좋아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하면 국악이 대중들에게 친근감있는 장르가 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던차에 '쓰리랑부부'라는 개그 프로그램을 만났기 때문에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이 문화재 이수를 한 사람이 자꾸 그런 TV프로 나가서 하면 안 된다. 그거 안하면 안되냐?"하는 만정 김소희 스승과 국악계의 반대 의견에도 KBS '쓰리랑부부'라는 개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Q. '쓰리랑부부'에 출연했을 당시 만정 김소희 스승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전화가 와서 선생님한테 촬영을 하지말라고 하라고 말해서 한번 부르시더니,

만정 김소희: 그거 안하면 안되냐?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고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이 (당시 80년대) 문화재 이수를 한 사람이 자꾸 그런 TV프로 나가서 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국창 신영희: 선생님 폐물을 살 때, 반지를 살 때, 이거 끼고 다니려고 삽니까? 여기다 넣어 두려고 삽니까?                                                                                     

만정 김소희: 그야  친구 아들들 결혼할 때 딸들 결혼할 때, 하려고 하지.
신영희: 우리 것도 마찬입니다. 좋은 보물을 우리만 갖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상품화 시켜서 들려주고 보여주고 막 재밌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할 거 아닙니까?

만정 김소희: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그래 그 말도 맞는데, 하도 말이 많아서......
신영희: 저 하겠습니다 
만정 김소희: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신영희의 기지와 설득으로 김소희 스승은 개그 프로그램 출연에 대해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신영희는 "전통음악 하는 사람이 코미디 프로그램에 꼭 나갔어야 했나?라는 어떤 서글픔도 있지만 국민들이 몰라주니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몰라 주니까 어떻게든 알려야겠다는 간절한 심정밖에 없었다."라고 '쓰리랑부부'에 출연을 결심한 이유를 말했다.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가 직접 제작을 의뢰한 스승 만정 김소희 초상화  ⓒ컬처타임즈

Q. 국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쓰리랑부부'에 출연하신 이유는? 

A. 국창 신영희 : 제일 슬펐고, 즐거움도 있었고, 촬영하면서 보람도 있었고, 아집도 있었고, 판소리하는 사람이 쓰리랑부부 그런데 나가서 그때만 해도 코미디언들이 조금 저속하다 그런 때였습니다. 코미디언들이 굉장히 머리가 좋습니다. 사실은 명문대도 나왔고......
왜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서 저기서 전화 와 가지고 하지 마라 하고 그러는데, 저는 그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우리만 갖고 있으면 뭐 합니까? 좋다 좋다 하면서 상품화 시켜야 합니다. 많은 세인들이 듣고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래야 되는데 국악이 나오면 TV 꺼버리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어떻게 하든지 대중들에게 좀 앞서서 그래서 내가 선구자 역할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쓰리랑 부부를 그렇게 4년을 했습니다. 최장기 TV프로였습니다. 1987년부터 1990년도까지 했습니다. 외국 사절단으로 가니 외국인들도 알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지만, 전통음악 하는 사람이 꼭 나갔어야 했냐?(쓰리랑부부) 라는 그런 서글픔도 있지마는 국민들이 몰라주니까 우리 것의 그 소중함을 몰라 주니까 어떻게든 알려야겠다는 그런 심정밖에 사실 없었습니다.

어렵게 출연을 결심하고 나선 개그 프로그램 '쓰리랑부부'는 공식 시청률이 60%를 넘는 전국민적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판소리 북을 치면서 추임새를 넣어주며 관찰자로 출연한 신영희의 활약으로 판소리가 점차 대중에게 알려지고 국악과 국악인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어 1993년 영화 ‘서편제’가 인기를 얻고, 박동진 명창의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 TV광고가 국악의 붐을 연이어 일으켰다.

▶ 만정 김소희 스승의 두 제자, 국창 신영희와 영화 '서편제'의 오정해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끈 국창 신영희와 영화 ‘서편제’의 여주인공 오정해는 만정 김소희 스승의 제자이다. 국악인으로 개그프로그램이나 연극, 영화에 출연하는 두 제자가 가는 길을 알게 모르게 길잡이를 해주는 스승 만정 김소희가 있었다. 

Q. 영화 '서편제'의 여주인공 오정해 씨와는 어떤 인연이십니까?

A. 국창 신영희 : 촬영을 4년 하다 보니 세인들 국민들의 귀에 눈에 판소리가 익어갈 때 서편제가 또 한 번 해주었습니다. 오정해가 만정 김소희 선생님의 막내입니다. 저는 맏이고 우리 선생님(만정 김소희) 제자 중에서 우리 오정해 씨는 제일 끝동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화 자주하고 둘이 굉장히 친하게 지냅니다. 오정해가 연극한다고 그래서 김소희 선생님께서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그래서 표를 주시면서, 
만정 김소희: 네가 가서 보고 어떻게 하는지 좀 보고 와 그리고 나한테 보고해.
신영희: 그러셨습니다. 선생님 성격이 굉장히 깐깐하시고 그러십니다. 그래도 바로 반대하시기보다는 저에게 살펴보게 하시고 제자를 뒤에서도 아끼셨습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신지가 95년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거의 30년 되어갑니다. 

서편제에 이어 또 박동진 선생님이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이렇게, 광고로 판소리를 대중에 알렸습니다.

신영희는 1980년대 차가웠던 국내의 반응과는 달리 해외에서는 판소리에 대해 "외국에 가면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정말로 좋아합니다. 저는 외국을 88년도 수교 되기 전에 헝가리에 두 번이나 갔다 오고 러시아 쪽으로 수교가 되기 전에 갔다 왔습니다."라고 밝히며 외국에서 국악의 인기를 전했다. 

신영희 명창은 국내 국외의 왕성한 소리꾼으로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창극, 연극 등 판소리 외의 장르에도 다방면의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신영희의 상과 트로피들  ⓒ컬처타임즈

Q. 백상예술특별상, 연기대상 등을 받으셨는데, 연극을 하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허규 씨라는 분이 "다시라기"를 연극제 한다고 나보고 주인공을 하라고 그래서 79년도 주인공을 했습니다. 다시라기, 쥐라기의 사람들, 해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를 지금 유동건 씨하고 했고, 전무송, 이호재, 이도련 함께 연기했던 분들이 많고, 유명한 분들과 옛날에 같이 연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상도 받았습니다.

Q.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A. 국창 신영희 : 제일 슬펐던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이 수술하시고 나서 간이 부어가지고 나중에는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멍이 들어서 파래지고, 그럴 때 밤이면 와서 그때 인도 사과라고 파란 사과가 있습니다. 커다란 사과인데 지금은 없답니다. 그것을 한두 개를 사가지고 와서 갈아서 드렸습니다. 치마에다가 싸가지고 오다가 바람이 불면 겨울에 넘어져 가지고 땅에 굴러가면 주우러 다니고 그런 일이 인생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 즙 내서 드리려고 그때 제 나이 열다섯살에 즙 내서 드리고 아침에는 밥을 못 드시니 쌀을 누룽지를 눌러 가지고 저어서 미음으로 만들어서 드렸는데 아버지께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제일 슬펐던 때는 그 때 였습니다.

명창으로의 공연활동과 다방면의 활동이외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서 우리 소리의 맥을 잇기 위한 전승활동도 해나가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사랑만큼 정 많던 신영희는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이 없어 생계를 위해 배달을 하는 제자를 걱정하고, 수업에 오는 제자들에게 뭐라도 있으면 싸 주고 내어주는 애정 가득한 스승이다.

코로나19로 생계를 위한 국악인의 배달 아르바이트

Q. 코로나19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연을 계속 하셨습니까?

A. 국창 신영희 :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들고 작년에도 공연을 봄에 한두 번 하고는 못 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을 저도 하지 못했고 제자들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해야 제  자들도 같이하는데 공연을 못했습니다.

어떤 제자는 배달하러 다닙니다. 새벽 두시까지도 피자 배달을 한다고 해서 그 말 듣고 울었습니다. 제자가 피자배달을 하다가 있었던 일을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자: 선생님 저기요.. 이런 사람이 있어요.

국창 신영희: 왜?

제자: 잘못 왔다고요. 갖고 가라면서 돈 내놓으라고 해서 돈 물어 주고 그랬어요.

국창 신영희: 나 그거 먹느라 혼났습니다. 나 같으면 그거 몇만 원도 아니고 1~2만 원일 텐데, 돈 주고 그거 두고 가세요. 아니면 갖고 가세요 갖다 잡수세요 하고 그리고 돈은 돈대로 주고 나는 그럴 것 같습니다. 제자에게 뭐 있으면 싸 주고, 어제 수업 때도 뭐 싸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래도 지방에서 제자들이 또 팬들이 여기저기서 내가 좋아하는 채소나 생선, 고기 뭐 이런 것 보내주십니다.  그럼 제자들도 나눠 줍니다.

대한민국 대표 명창 신영희는 내년 소리 인생 70주년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있다. 국창 신영희는 10살 때 소리를 시작해 지금 생각해도 소리를 하기 참 잘했고, 다시 태어나도 소리를 하겠다고 말한다.

80년대 사멸되다시피하는 판소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국악계 내부의 반대의 소리와 만정 김소희 스승의 만류에도 오히려 스승을 설득하며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창극, 연극 등 판소리 외의 장르에서도 도전과 열정으로 다방면의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이다. 현재도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이 없어 생계를 위해 배달 일을 해야 하는 제자들의 생활을 함께 걱정하며 보유자로서 판소리를 전승하고 계보를 이어나가 일에 정진하고 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판소리를 사랑하며 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는 후학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스승으로 명창으로 인생의 깊은 이야기를 소리에 담아 열창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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