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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에서 돌아온 국권의 상징 '국새 대군주보’ 등 국새 4과 보물로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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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에서 돌아온 국권의 상징 '국새 대군주보’ 등 국새 4과 보물로 지정한다.
  • 백석원 기자
  • 승인 2021.08.24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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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 정면(출처/문화재청)

문화재청은 2019년 미국에서 환수한 19세기 ‘국새 대군주보’를 비롯해 1946년 일본에서 환수한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4과, 고려 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을 비롯해 조선 초기 음식조리서인 ‘수운잡방’, 불경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등 총 7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24일 밝혔다.

▲'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 보면(출처/문화재청)

‘국새 대군주보’ 등 4과는 모두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로서, 보물로서의 역사적 상징성과 조형성을 인정받았다.

국새(國璽)는 국가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된 도장이며, 어보(御寶)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으로,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죽은 후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하여 국가에서 관리한다.

「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는 1882년(고종 19년) 7월 1일 제작된 것으로, 높이 7.9cm, 길이 12.7cm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귀뉴 龜鈕)와 도장 몸체(인판 印板)로 구성된 정사각형 형태의 인장이다. 보면(寶面)에는 구첩전(九疊篆)으로 대조선국의 대군주라는 의미를 지닌 ‘大君主寶(대군주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한 국새로, 2019년 12월 미국의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환수되었으며,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국새 대군주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19세기 말 급변하던 국제정세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왕실의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 당시 고종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고종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國旗)와 국새(國璽)를 함께 만들도록 명했으며, 무위영(武衛營, 고종대 궁궐 수비를 맡은 관청)에서 호조의 예산을 지원 받아 완성하였다. 즉, 이 국새는 고종이 대외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표시하는 용도로 국가 간 비준이나 공식 문서에 자주독립국을 지향하는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총 6과의 국새가 만들어졌지만 이 ‘국새 대군주보’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1897년 10월 11일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국호(國號)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국새도 ‘대한국새(大韓國璽)’로 바뀌었다. 이에 1899년 1월부터 ‘대한국새’를 사용하면서 ‘대군주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국새 대군주보’는 이처럼 갑오개혁을 전후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유물이다. 또한, 서체, 형태 재질, 주물방식 등 대한제국 이전 고종 대 국새제작 방식이 담겨진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함께 지정된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된 것으로,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6개월 후인 1911년 3월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宮內廳)으로 들어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에서 환수해 총무처(1940~1960년대 국무총리 소속 아래 설치되었던 중앙행정기관)에 인계한 후 1954년 6월 28일 총무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인계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궁내청(宮內廳)은 일본 황실과 관련된 사무와 문서, 옥새와 국새 관리 등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1869년 설치되었고 일본 도쿄에 위치해 있다.

1946년 미군정으로부터 환수 받은 6과의 국새는 1949년 총무처 주관으로 특별전에서 공개된 후 6․25 전쟁 동안 모두 유실됐다. 그 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54년 ‘제고지보’, ‘대원수보’, ‘칙명지보’ 3과가 경남도청 금고에서 발견되었고 그 해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됐다.(1965.3.20일자 동아일보 기사)

국새 3과 모두 1897년(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한 문서 또는 임명장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대한제국 국새 중 일부로, 왕실 인장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보장(寶匠) 전흥길(全興吉) 등이 주도해 제작했다.

전흥길은 1851년부터 1897년까지 47년간 금보(金寶) 제작에 있어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장인으로, 전수명(全壽命), 전억만(全億萬), 전일만(全一萬) 등과 더불어 인장 제작 분야에 전문적 가업(家業)을 계승해 19세기 대표적 보장(寶匠) 가문을 형성한 인물이다.

3과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국새 제고지보(國璽 制誥之寶)」는 1897년 9월 19일 완성된 인장이다. ‘제고(制誥)’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국새는 조선왕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한 국새이다.

형상을 보면 손잡이는 용 모양이고 등은 위로 솟구쳐 반원형이다. 용의 정수리에는 점문(點紋)과 비늘이 있고, 머리에는 녹각뿔이 솟아있다. 코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 일종의 구름형상의 문양)이 새겨졌고, 입을 벌리고 이빨 2개가 아래로 돌출되었으며, 입 주위로 상서로운 문양이 새겨있고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상상의 동물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자세히 묘사하였고 도금(鍍金)이 벗겨지지 않아 황금빛이 잘 남아 있다.

▲'국새 제고지보' 측면(출처/문화재청)

이 ‘국새 제고지보’는 대한제국 국새로서 조선 왕실 어보(御寶)와 형식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조선왕실 어보가 거북형 귀뉴(龜鈕)인데 반해 대한제국 국새는 용뉴(龍鈕, 용모양의 손잡이)인 점, 용뉴의 받침대를 마련했다는 점, 보면(寶面)의 크기가 조선왕실 보인(寶印)에 비해 사방 2cm 정도 크다는 점, 보면의 글씨체가 조선 어보의 구첩전(九疊篆)에서 소전(小篆)으로 바뀐 점 등 여러 면에서 대한제국기 국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국새 제고지보’는 대한제국기 황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며, 공예, 서예, 전각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적 역량이 담긴 문화재다. 미확인된 대한제국 국새의 발견을 위한 근거자료로서의 가치도 크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

「국새 칙명지보(國璽 勅命之寶)」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서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제국 국새 10과 중 하나로, 1898년 윤3월 19일에 제작되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제작하였고 그 결과 1897년 9월 17일~19일 동안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명헌태후지보(明憲太后之寶)’, ‘황후지보(皇后之寶)’, ‘황태자보(皇太子寶)’, ‘황태자비지보(皇太子妃之寶)’ 10과를 완성했다.

칙명(勅命)은 황제가 관료에게 내린 명령이라는 의미로, 대한제국 이전에는 ‘왕지(王旨)’ 또는 ‘교지(敎旨)’라고 불렀다.

이번에 지정된 것은 1897년 9월에 제작된 ‘칙명지보’가 아닌 이듬해 1898년 윤3월 19일에 좀 더 작은 크기로 만든 것이다. 용뉴와 보신(寶身)으로 구성되었고 발톱을 세우고 웅크린 형상, 몸통 전체에 덮인 비늘 문양, 머리에 솟은 뿔, 얼굴 주변의 상서로운 기운 등 신비감과 동시에 제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하다.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는 1899년(광무 3) 6월 22일 대한제국이 육해군을 통솔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원수지보(元帥之寶)’ 1과, ‘원수부인(元帥府印)’ 1과를 만든 것 중 하나이다. 대원수(大元帥)는 원수부의 우두머리로, 국가의 전군(全軍)을 통솔하는 최고 계급을 지칭한다. 군인 임명서 등에 날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 측면(출처/문화재청)

용모양의 손잡이인 용뉴(龍鈕)와 유대(鈕臺, 얕은 받침), 보신(寶身)으로 구성되었고, 서체는 소전체로 단정하고 정갈하다. 시간이 흘러 일부 변색되거나 탈색된 부분이 있지만 제작 당시의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용뉴와 보면(寶面)의 문자 또한, 훼손 없이 잘 남아 있다.

용뉴의 받침을 갖춘 대한제국 국새로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고종황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고 강력한 군사력 강화를 통해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 보면(출처/문화재청)

이상의 대한제국 국새 3과는『대례의궤(大禮儀軌)』등 관련 문헌에 형태와 재료, 치수 등이 상세히 수록되었고 당시 발행된 공식문서에 실제 사용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외세로 인해 혼란했던 시기에 국가의 운명과 수난을 함께 겪은 역사상징물이자 희소성이 크다는 면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서울 寧國寺址 出土 儀式供養具 一括)」은 조선 시대 유학자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중심 건물지로 추정되는 제5호 건물지의 기단 아래에서 2012년 수습된 것이다. 출토된 유물 총 67건 79점 중 매장환경을 알려주거나 명문이 있어 제작시기가 뚜렷한 것, 조형성이 우수한 작품을 선별한 결과, 금동금강저(金銅金剛杵) 1점, 금동금강령(金銅金剛鈴) 1점, 청동현향로(靑銅懸香爐) 1점, 청동향합(靑銅香盒) 1점, 청동숟가락 3점, 청동굽다리 그릇 1점, 청동유개호(靑銅有蓋壺) 1점, 청동동이(靑銅缸) 1점 등 총 10점을 지정하기로 했다.원래 조선 시대 도봉서원 터라고 알려진 이곳은 2017년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도중 고려 초기 고승 혜거국사(慧炬國師) 홍소(弘炤, 899∼974)의 비석(碑石) 파편이 발견됐고, 비문의 내용 중 ‘도봉산 영국사’(道峯山 寧國寺)라는 명문이 판독됨에 따라 이 지역이 고려 시대 사찰 ‘영국사(寧國寺)’의 터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로써 도봉서원이 영국사 터에 건립되었다는 사실과 발굴지에서 수습된 금속공예품은 바로 영국사에서 사용한 고려 불교의식용 공예품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금동금강령(金銅金剛鈴)과 탁설(출처/문화재청)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은 출토지가 분명하고, 고려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된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법과 더불어 공양의식에 사용했던 다양한 금속기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공예사와 불교사상 의의가 크다고 평가된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은 경북 안동의 유학자 김유(金綏, 1491∼1555)에서부터 그의 손자 김영(金坽, 1577∼1641)에 이르기까지 3대가 저술한 한문 필사본 음식조리서이다. ‘수운잡방’은 즐겁게 먹을 음식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의미로, 음식 조리서가 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첫 사례이다.

▲수운잡방(需雲雜方)(출처/문화재청)

이 책은 김유가 지은 앞부분에 86항, 김영이 지은 뒷부분에 36항이 수록되어 모두 122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14종의 음식 조리와 관련 내용이 수록되었다. 항목을 분류하면 주류(酒類) 57종, 식초류 6종, 채소 절임 및 침채(沈菜, 김치류) 14종, 장류(醬類) 9종, 조과(造菓, 과자류) 및 당류(糖類, 사탕류) 5종, 찬물류 6종, 탕류 6종, 두부 1종, 타락(駝酪, 우유) 1종, 면류 2종, 채소와 과일의 파종과 저장법 7종이다. 중국이나 조선의 다른 요리서를 참조한 예도 있지만, ‘오천양법(烏川釀法, 안동 오천지방의 술 빚는 법)’ 등 조선 시대 안동지역 양반가에서 만든 음식법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수운잡방’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제사를 받드는 문화인 ‘봉제사(奉祭祀)’와 손님을 모시는 문화인 ‘접빈객(接賓客)’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자 우리나라 전통 조리법과 저장법의 기원과 역사, 조선 초‧중기 음식 관련 용어 등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의의가 있다. 아울러 저자가 직접 쓴 원고본이고 후대의 전사본(傳寫本, 베낀 글)도 알려지지 않은 유일본으로서 서지적 가치도 크다.

‘수운잡방’은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전기 요리서가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있다는 점, 당시 사람들의 음식 문화를 담고 있는 고유의 독창성이 돋보인다는 점,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인의 음식문화 기원을 찾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인정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禮念彌陀道場懺法 卷一∼五)’는 부산 고불사(古佛寺) 소장으로, 1474년(성종 5년)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발원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개판한 왕실판본(王室版本) 불경이다. 10권 2책의 완질 중 권1∼5의 1책에 해당한다.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禮念彌陀道場懺法 卷一∼五)’(출처/문화재청)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예념미타도량참법의 가장 오랜 판본은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고려의 승려 혜랑(慧朗) 등이 간행한 책이 전하며, 이번 지정된 고불사 소장본은 1474년경에 찍은 판본으로 추정된다. 이 판본은 간행 이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간행되는 예념미타도량참법의 모태가 되는 자료로서 조선 전기 불교사상과 인쇄문화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자료이다.

고불사 소장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는 인수대비와 인혜대비를 비롯해 공주, 숙의(淑儀), 상궁(尙宮) 등 여인들과 월산대군(月山大君)‧제안대군(齊安大君) 등 왕실 인사들, 신미(信眉)‧학열(學悅)‧학조(學祖) 등 당대 중요 고승들이 참여한 정황이 명확하고, 판각과 인쇄에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이 모두 나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가적인 불경 간행사업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책 앞머리에 수록된 과거‧현재‧미래 삼세불(三世佛) 도상은 화원(畵員) 백종린(白終麟)과 이장손(李長孫)이 그린 것으로, 연대와 작가가 확실한 조선 초기 판화라는 점에서 당시 불교사, 인쇄사, 회화사 연구에도 의의가 크다.

문화재청 박수희 담당자는 "이번에 지정한 ‘국새 대군주보’,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 등 7건에 대해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으로 임해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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